‘피의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긴 하루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라며 사법농단 법적 책임은 부인
중앙지검 15층에서 조사…의혹 문건 내밀자 “기억이 안 난다”
조서 열람 후 밤늦게 귀가…다음주 초에 추가 조사 끝날 듯
11일 사법부 수장 출신으로는 헌정사상 처음 검찰에 피의자로 출석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이 조사 전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대법원이었다. 피의자가 검찰 출석 직전 자신의 소속 기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전례는 없다. ‘부적절하다’는 비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12년 넘게 일한 곳 앞에 나와 입장을 밝혔다.
■ 혼돈의 기자회견
대법원과 서울중앙지검이 위치한 서울 서초동 일대는 새벽부터 경찰과 시위대, 취재진으로 혼잡했다. 대법원 정문 앞에서는 전날 밤부터 일부 시민들이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항의 시위를 준비했다.
오전 9시 검은색 그랜저 차량이 대법원 앞에 도착하고 양 전 대법원장이 내렸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찰들의 호위를 받은 그를 둘러싼 법원노조, 민중당 등 소속 시민 100여명이 “대법원 앞이 아니라 검찰 포토라인에 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양승태는 사죄하라’ ‘양승태 구속’이 적힌 펼침막과 손팻말을 들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도의적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법적 책임은 부인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모든 것이 저의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고 따라서 그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면서도 “(부당한 인사개입과 재판개입이 없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시선으로 이 사건을 봐달라”며 사법농단 사건이 허구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 “나중에라도 만일 그 사람들(후배 법관들)에게 과오가 있다고 밝혀진다면 그 역시 제 책임이고 제가 안고 가겠다”며 과거 자기 휘하의 일부 법관들이 자기 몰래 죄를 지은 양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도 했다.
시민들의 규탄 목소리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의 회견 발언은 잘 들리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기자 질문을 받은 뒤 5분 만에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의 구속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던 시민이 차량을 향해 뛰어들다 경찰에 저지당하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시민들이 중앙지검 주변에서 집회를 벌였다.
■ 검찰은 무엇을 물었나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출발 2분 만에 중앙지검 청사 앞에 도착했다. 그는 심경을 묻는 취재진 질문에 답하지 않고 포토라인을 지나갔다. 청사 중앙문으로 들어가 일반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 1522호 조사실로 올라갔다.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가 조사실에서 맞았다. 한 차장은 조사 시작 전 티타임에서 조사 방식, 신문 검사 등을 소개했다.
예정된 오전 9시30분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이 동의해 조사 내용은 모두 녹화됐다. 안전을 고려해 점심과 저녁은 도시락을 배달해 먹었다. 신문을 진행한 박주성·단성한 부부장검사는 그를 ‘원장님’이라고 불렀다.
검찰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의 40개 넘는 혐의 중 주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개입과 이를 이용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 의혹,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 등 사법농단 사건에서 가장 중한 혐의로 꼽히는 내용을 신문했다. 검찰은 대법원이 청와대, 외교부와 접촉해 일제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뒤집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양 전 대법원장이 관여한 사실을 입증할 다수 증거를 확보한 상태다. 양 전 대법원장이 전범기업을 대리하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한상호 변호사와 대법원장 집무실에서 만나 재판 계획을 알려준 정황에 대해서도 검찰은 물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신인 최정숙 변호사 등 2명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건과 진술을 들이미는 검찰에 양 전 대법원장은 범죄 혐의와 책임을 부인하며 “기억나지 않는다” “실무진에서 한 일을 알지 못한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오후 8시40분쯤 조사를 마치고 조서를 열람한 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 향후 수사와 구속은?
검찰은 비공개로 추가 소환을 진행해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를 마치려 한다. 다음주 초쯤이면 조사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사회적 주목도와 관심을 감안할 때 너무 오래 조사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조직적 범죄’인 만큼 실무책임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됐으니 총책인 양 전 대법원장 구속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검찰은 앞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헌정사상 유례없이 7개월간 이어진 사법부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는 종국을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