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책임 이유로 법관 독립 침해” “검사님들 법관사회 이해 부족”

이혜리 기자

마라톤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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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직권남용죄 핵심 ‘직권 범위’ 두고
검찰·이민걸 전 행정처 실장 측
밤까지 ‘11시간30분’ 법리 다툼

11시간30분.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재판에서 검찰과 피고인 측이 공방을 벌인 시간이다.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11시에 끝난 재판의 주제는 ‘직권남용죄’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최근엔 조국 전 법무부 장관까지 옭아맨 바로 그 범죄다. 이 마라톤 공방은 지난해 11월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508호 법정에서 벌어졌다.

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공무원이 주어진 권한을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함부로 쓰면 범죄로 보고 처벌하는 조항이다. 쌓인 판례가 많지 않은 만큼 말도, 논란도 많다. 직권남용죄 적용 범위를 너무 넓히면 공무원의 행동을 지나치게 제약하고, 너무 좁히면 제멋대로의 권한 사용을 단죄할 수 없다.

법원이 유죄를 선고하려면 피고인의 행위가 법에서 정한 범죄 요건에 맞아떨어져야 한다. 범죄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도덕이나 윤리에 어긋나 사회적 비난을 받을 만한 행위더라도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재판 대부분은 법리 다툼으로 채워진다.

이 전 실장 재판에선 직권남용죄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검찰과 피고인 측이 다툰다. 논리 대결은 치열하다. 사건을 심리하는 형사32부의 3명의 판사(윤종섭·김용신·송인석)는 양측에 의문점을 캐묻는다. 대법원과 하급심 법원의 판례를 찾아내고, 사법농단 사건에 대조한다. 직권남용죄의 연혁과 취지, 사법의 역할과 재판 개입의 정의를 따진다.

■ 사법의 독립과 책임

이 전 실장은 양 전 대법원장 등과 공모해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행정소송을 담당하는 재판부에 법원행정처 문건을 줘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일단 직권(일반적 직무권한)이 있다는 사실이 인정돼야 한다. 직권이란 외견상 정당한 권한 행사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즉 양 전 대법원장 등의 행위가 사법행정권 행사의 외관을 띠어야 직권남용죄가 성립하고, 누가 봐도 사법행정권 행사 바깥이라면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 법원은 대통령 직권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인정한다. 대법원장과 같은 사법행정권자의 직권, 특히 사법부 내부의 권한남용을 논의한 적은 없다. 또 다른 재판 개입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판사 사건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 송인권 재판장은 “재판부가 가장 궁금하고 마지막까지 고심하고 있는 부분이 일반적 직무권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 ‘사법 책임’ 개념 꺼내들자
이민걸 측 ‘포괄적 주장’ 반박하며
“행정처는 법무부 검찰국과 달라
오히려 판사들에게 꼼짝도 못해”

검찰은 이 전 실장 재판에서 ‘사법 독립’과 함께 ‘사법 책임’이라는 개념을 들고나왔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시민의 권리를 달성하려면 법관 독립뿐만 아니라, 재판에 대한 감독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개념이다. 법관의 막말, 고의 재판 지연, 편파 진행, 인권침해 등을 막기 위한 게 이 감독권이라고 검찰은 주장한다. 양 전 대법원장이나 이 전 실장처럼 사법부 위상 강화를 목적으로 감독권을 이용해 재판에 개입하면 직권의 남용이 된다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가기관이 민주적 정당성 위에 있어야 합니다. 국민의 신임 위에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법관도 마찬가지입니다. … 사법행정이 사법의 책임을 이유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지만, 법관의 독립을 이유로 법관의 독단을 방기하는 것도 무책임이라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남철우 검사)

‘사법 책임’이라는 단어를 검찰이 지어낸 것은 아니다. 서기호 전 의원이 법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 뒤 이 제도가 헌법 위반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2016년 9월 합헌 결정문에 이 단어가 나온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사법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그것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법의 독립성 외에 ‘책임성’도 함께 요구된다”고 했다. 사법 책임의 관점에서 판사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연임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같은 ‘참모 조직’이 지근거리에서 상급자를 보좌하기 때문에 그 권한·의무를 폭넓게 봐야 한다고 말한다. 직권 범위가 구체적으로 법에 명시돼있지 않고 포괄적으로 규정돼 있더라도 상급자의 업무지시가 법에 위배되면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오병두 홍익대 법대 교수는 논문에서 “판사에게는 법적 결정을 함에 있어서 광범한 재량과 권한이 유보돼 있다. 일반적 직무권한과 그에 대한 형사책임영역이 (일반 공무원보다) 넓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민걸 전 실장 측은 정반대로 주장한다. 검찰이 들고나온 ‘사법 책임’과 ‘사법행정권’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라서 문제라고 반박한다. 사법 책임 관점에서 재판에 대한 감독권이 존재하더라도 그 감독권은 법원행정처에 있는 게 아니라 각 법원의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편다. 법원행정처에 감독권이 있다면 재판 개입의 가능성을 더욱 열어주는 해석이라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사법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다만 사법의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대법원장에게 사법 책임의 최고 정점적 지위를 부여하고, 포괄적 사법행정권을 부여한다면 (그야말로) 이 시대에서 극복해야 할 제왕적 대법원장 아닙니까? 그걸 우리가 왜 받아들여야 합니까?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행사도 개별 법률의 근거를 찾아야 됩니다. 폐해라고 검사가 주장하는 제왕적 대법원장이, 이번에는 사법 책임의 수호자로 등장하면 착한 일만 할 것 같습니까? 모든 권력은 타락합니다. 포괄적 권한의 함정입니다.”(이 전 실장 측 민병훈 변호사)

‘사법 책임’은 법원행정처에 있는 게 아니라 개별 재판부에 있다는 주장도 편다.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검찰의 생각은 현실과도 다르다고 한다. “검사님들이 법관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검사님들은 법원행정처를 법무부 검찰국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검찰국 세죠. 개별적으로 수사지휘도 하지 않습니까? 법원행정처는 다릅니다. 오히려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에게 설설 깁니다. 저도 예전에 있어봤지만 판사들이 성질내면 (법원행정처는) 꼼짝 못합니다. (판사들이) 알아서 기는 경우가 있으니까 문제죠.”(민 변호사)

■ 재판 개입의 정의

검찰 “행정처 ‘심적 평온’ 흔들어”
‘추상적 개념’ 받아친 이민걸 측
“영장 기각 비판하며 재청구한 건
수사기관이 평온을 깬 것 아니냐”

공방은 법원행정처의 참고자료 전달 등 재판 개입으로 일선 재판부가 과연 무엇을 방해 당했는지의 문제로 이어진다.

검찰은 재판 개입이 법관의 ‘심적 평온’을 흔들어 재판권을 침해했다고 했다. “(법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법원행정처가) 특정 결론을 유도하는 것에 노출된 것이고, 그러한 노출 자체가 심적 평온 상태에서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위한 법관의 외부적 환경을 침해한 것이라는 말입니다.”(남 검사)

법원행정처 입장인지 모른 채 상급자에게 재판 방향에 관한 언질·자료를 받은 경우에도 심적 평온이 흔들렸다고 봐야 할까. 검찰은 일선 재판부에서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 법원행정처가 선제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점에 주목한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입장이라고 명확히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료 전달 등으로) 법리적 문제점을 환기시키는 것 자체로 (해당 법관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그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라며 “해당 법관의 능력과 독자적인 법적 판단에 대한 신뢰와 자주적 검토하에 이뤄지는 법관의 재판권이 이미 침해됐다”고 했다.

이 전 실장 측은 ‘심적 평온’이라는 개념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침해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영장 재판에 있어서 수사기관이 법원을 비판하면서 영장을 재청구하면 법관의 평온을 안 깹니까? 그런 건 평온을 깨는 행위가 아닙니까? 물론 그것은 직권의 행사에 기하지 않아서 직권남용죄는 아니겠죠. 하지만 법관은 미풍도 불면 안되는 것처럼 미약한 존재로 세팅하는 것 자체에 저는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권리는 방해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권리만 방해가 가능합니다.”(민 변호사)

우배석 김용신 판사는 검찰이 말한 ‘심적 평온’이 재판에 대한 법관의 ‘심증’을 말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내면에 형성되는 심증을 방해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같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공방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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