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판사 잘못 지적을 넘은 권고…“그것은 재판이 아니다”

이혜리 기자

다시 쓰는 ‘재판의 정의’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들이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당 소속 지방의회의원들이 낸 행정소송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유죄 선고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들이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당 소속 지방의회의원들이 낸 행정소송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유죄 선고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농단 연루 법관에게 처음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진 지난 23일. 선고문을 낭독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2부 윤종섭 재판장의 입에선 “그것은 재판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해 나왔다. 재판부는 사건의 당사자도 아닌 제3자가 제시한 방향에 맞춰 진행된 재판은 단순히 부적절한 것을 넘어 아예 재판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재판에 대한 선배 법관의 조언까지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며 재판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일각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판단이다. 사법농단 재판에서 재판의 정의가 다시 쓰이는 순간이었다.

재판부는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전체 458쪽에 달하는 판결문 중 53쪽에 걸쳐 직권남용죄의 해석과 사법행정권의 범위·한계에 관해 썼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과연 형법상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기준을 세웠다. 유죄가 인정된 공소사실엔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직접 영향을 준 2건이 포함됐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35)판사 잘못 지적을 넘은 권고…“그것은 재판이 아니다”

■ 사법의 독립과 책임의 조화

명백한 잘못 없는 판사에게 ‘권고’
사법행정권자의 직권 범위 벗어나

법원행정처는 ‘참고자료’ 줬다지만
판사 입장선 완전히 무시하지 못해

직권남용죄 재판의 쟁점은 크게 3가지다. ①직권(직무권한)이 존재하는지, ②직권을 남용했는지, ③직권의 남용으로 인해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그의 권리행사를 방해했는지다. 앞서 임성근 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은 첫 쟁점 판단에서부터 막혔다. 임 판사 측은 “재판은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이 재판부는 재판 독립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재판에는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으며, 재판에 대한 사법행정권자의 직무감독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위헌적인 재판개입이 있었지만 형법상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결론냈다.

이번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실장 사건의 재판부는 현행 법과 제도를 관찰해보면, 재판도 명백한 잘못이 있을 때 판사가 사법행정권자의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봤다. 이 지적은 사실관계 확정과 헌법·법령의 해석·적용, 이를 위한 모든 실체적·절차적 판단영역을 말하는 재판의 ‘핵심영역’에 관해서도 가능하다고 했다.

장기 미제 사건이 너무 많이 쌓여 사건 처리가 현저히 지연되고, 판사가 법 해석을 숙지하지 못한 채 미숙한 재판을 거듭하다가 명백한 잘못까지 하는 경우가 사법행정권자가 지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판결에 언급됐다. 빨리 처리해야 하는 중요 사건으로 지정됐는데도 정당한 이유 없이 처리를 미루는 사례도 있다. 재판 독립이 중요하지만 이런 경우에까지 판사가 아무런 지적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다는 게 이번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 독립만큼이나 국민에게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심판한다고 규정한 헌법 취지를 구현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어 현재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근무성적이나 10년 주기의 재임용 심사 등으로 나태하고 미숙한 판사를 배제할 수 있는데, 이런 절차는 가능하면서도 평소 명백한 잘못을 지적할 권한은 없다고 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도 했다. 근무성적은 판사에게 기준과 내용이 정확히 공개되지도 않는다.

재판부 판단을 자칫 잘못 읽으면 ‘사법행정권자가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기서 재판부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재판부는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의 권한은 지적 자체에 그치고, 사법행정권자가 이를 벗어나 사건 처리 시기를 정해준다든지,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하는 등 구체적인 ‘권고’나 ‘유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재판 독립을 해쳐 재판의 본질에서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판결문의 한 대목이다. “소송의 당사자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할 뿐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송의 당사자로부터 독립한 제3자, 즉 판사의 재판이 필요하고, 재판의 독립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소송의 당사자 일방의 편에 서서 하는 재판은 벌써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기에 재판의 독립은 중요하다. 나아가 재판에 있어서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정하고 확정된 사실관계에 맞는 결론을 내리는 것, 즉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데, 제3자는 애당초 해당 재판의 증거를 접하기 어렵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기에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릴 기초 자체가 마련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해당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이외의 제3자가 마련한 방향에 따라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역시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 “자신도 판사이면서 재판권 침해를”

“제3자가 제시한 방향에 맞춘 결론
부적절함 넘어 재판이 아냐” 판결

공무원이 자신의 직권 범위 내에서 남용 행위를 하면 직권남용죄의 전형적인 처벌 대상이다. 반면 직권과 무관한 행위는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과 관련없는 사기업에 특정 인사를 채용하도록 요구한 행위를 무죄로 판단한 국정농단 판결이 그 예다. 그런데 직권 범위는 다소 벗어났지만 직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직권남용죄 법리를 세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판결에서 대법원은 “직권남용이란 공무원이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하여 그 권한을 위법·부당하게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사법농단 사건의 피고인들은 ‘속하는 사항’에 주목해 직권 범위 내의 행위만 직권남용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른바 ‘권한 없이 남용 없다’는 프레임이다. 피고인들과 달리 이번 재판부는 ‘관하여’에 주목했다. 직권 범위 내의 행위(재량적 남용)는 물론이고, 직권 범위에서 벗어난 행위라고 하더라도 직권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때 남용으로 평가할 수 있다(월권적 남용)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법행정권자의 직권은 명백한 잘못이 있는 판사에 대한 지적 권한이지만, 명백하지 않은 잘못이 있는 판사에게 결정을 변경하라고 권고한 사법농단 사건이 직권남용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다만 직권남용으로 인해 ‘재판권 침해’라는 권리행사방해의 결과가 발생했는지는 경우에 따라 판단이 달랐다. 재판부는 아직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은 판사에게 사법행정권자가 개입했는데, 해당 판사가 사법행정권자 말을 듣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판결한 때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결정이나 판결을 한 이후 사법행정권자가 개입했고, 실제 해당 판사가 사법행정권자 말대로 결정이나 판결을 바꿨다면 직권남용과 재판권 침해의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봤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2건이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돼 유죄로 인정됐다. 하나는 헌법재판소와의 관계에서 대법원이 우위를 점하려는 법원행정처 기조하에 이 전 상임위원이 연락해 염기창 판사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바꾼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이 전 상임위원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후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들이 낸 행정소송을 심리하던 박강회 판사에게 ‘직위 상실 여부에 대한 판단 권한은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사법부에 있고, 따라서 결론은 청구기각이 맞다’고 말해 박 판사가 청구기각 방안을 검토하고, 결국 선고기일을 미룬 사건이다. 재판부는 두 사례 모두 사법행정권자의 정당한 지적 권한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전 상임위원의 양형 이유에 “그 스스로도 판사이면서 구체화된 재판권의 행사를 두 번이나 현실적으로 방해한 것은 특히 중대하다”고 썼다.

법원행정처 문건이나 입장이 일선 법원에 전달된 사실은 인정됐지만 해당 재판부가 자의로 판결했다는 이유로 무죄 판단을 받은 사례가 있다. 특히 이 전 실장이 통진당 행정소송 관련 문건을 이동원 서울고법 부장판사(현 대법관)에게 전달한 행위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이 대법관이 주요하게 생각한 사건 쟁점이 해당 문건에 들어 있지 않는 등 재판은 문건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했다고 봐 재판권이 침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법농단 사건은 왜 발생했을까. 사법농단 사건의 피고인들은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에 재판과 관련된 자료를 준 것은 참고자료일 뿐, 재판 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번 재판부는 이 같은 피고인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바로 그 지점이 사법농단 사건이 발생한 배경이라고 짚었다. 판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실무처리 사례 등을 담은 실무제요와 업무편람을 발간하는 것은 법원행정처 업무(송무·법령조사 및 사법제도 연구)이긴 하지만, 이는 재판 개입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해당 업무의 목적은 판사의 평균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특정 사건의 처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강제성도 없다.

하지만 사법농단에서 문제된 것은 특정 사건의 자료였고, 인사권을 갖고 있는 사법행정권자가 자료를 줬을 때 판사가 완전히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재판부는 “어느 순간 두 가지의 구별이 흐려졌고, 그렇기에 사법행정권자가 어느 순간 특정 사건 재판사무의 핵심 영역에 대한 지적 권한을 그 범위를 넘어 행사하면서도 스스로 송무·법령조사 및 사법제도 연구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게 됐다”며 “사법행정권자의 이 같은 인식이 이 사건을 야기하게 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실장은 항소했다. 검찰도 두 사람의 무죄 부분 등에 대해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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