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양심’ 증명한 구체적 소명자료로 병역거부 인정받아읽음

유설희 기자

대법, 과거와 다른 판단 왜

대법원이 24일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사람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진정한 양심’의 범위를 다른 종교적 신념, 반전주의, 페미니즘 등으로 넓혔다는 데 의미가 있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음에도 그동안 800명이 넘는 여호와의증인 신도에게만 무죄가 선고되어온 터다.

<b>대법원 앞 외침</b> 병역거부로 대체복무 심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임진광씨(가운데)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법원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대법원은 이날 비폭력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남성에게 처음으로 무죄를 확정했다. /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대법원 앞 외침 병역거부로 대체복무 심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임진광씨(가운데)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법원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대법원은 이날 비폭력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남성에게 처음으로 무죄를 확정했다. /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쟁점은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사람이 비폭력주의, 반전주의, 페미니즘 등의 신념에 따라 현역병 입영을 거부하는 경우에도 병역법 제88조 제1항에서 정한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정모씨(34)는 한 기독교 종파 신자·성소수자·퀴어 페미니스트로서 비폭력주의·반전주의 등 신념에 따라 입영을 거부한 것은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폭력 반대 시위 참석
퀴어 등 성소수자 논문도 써
대법 “정당한 사유에 해당”

특정 종교 신도 무죄 판단서
기독교·반전주의·페미니즘
‘진정한 양심’의 범위도 넓혀

2018년 2월 1심은 정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가 병역 기피 행위를 처벌하는 병역법 제88조 제1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했고 200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지난해 11월 2심은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하급심의 첫 무죄 판결이었다. 1심 선고 이후인 2018년 6월 헌재가 대체복무 규정 없는 병역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18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내용의 판례 변경을 한 것을 무죄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면,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고, 이때 진정한 양심이란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것을 말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양심을 직접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므로 양심과 관련성이 있는 간접사실 또는 정황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즉 ‘진정한 양심’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소명자료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진정한 양심’ 증명한 구체적 소명자료로 병역거부 인정받아

정씨는 ‘진정한 양심’을 증명하기 위한 소명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정씨는 대학생 시절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을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염원하는 기독교단체 긴급기도회’ ‘제주 평화 순례’ ‘수요시위’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폭력에 반대하는 여러 시위에 참여해왔다는 사실확인서를 냈다. 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에서 작성한 성소수자 관련 기사, 대학원에서 작성한 페미니즘 관련 논문 등도 제출했다. 2심은 이 같은 자료를 토대로 정씨의 ‘진정한 양심’을 인정했다. 검찰은 정씨의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까지 사실조회 신청을 하며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지 따졌지만 2심 재판부는 “폭력적인 성향을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 대법원은 이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피고인은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단순히 기독교 신앙(교리)만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은 기존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 사안과는 구별된다”며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비폭력주의·반전주의 신념과 신앙을 이유로 현역병 입영을 거부한 사안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수긍한 최초 판결”이라고 밝혔다.

이 판결로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병역거부자들이 무죄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넓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씨 변호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정씨만 해도 1년치 휴대폰 기지국 위치를 조회해 실제로 종교활동을 했는지 확인했다”며 “과도한 양심 검증 과정이 이뤄지고 있는데, 양심을 심사하는 과정도 인권 친화적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종교적 신념이든 비종교적 신념이든 피고인의 인생을 개별적으로 살펴서 진정한 양심인지 판단한 것”이라며 “개별 사건마다 진정한 양심이 얼마나 증명됐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종교적 신념이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넓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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