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지학순 주교 조카 "상속인이 재심 청구 못하는 모순적 상황"

전현진 기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1972년 2월17일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한 고 지학순 주교(가운데)가 서울구치소 앞에서 취재진에게 소감을 말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1972년 2월17일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한 고 지학순 주교(가운데)가 서울구치소 앞에서 취재진에게 소감을 말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괴로움이 가득 찬 이 어두운 현실에서 촛불을 밝혀 들고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길을 비추어 갑시다.”

고 지학순 주교의 조카 지용씨(61)가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에 낸 재심(2차 재심) 청구서의 마지막 부분이다. 박정희 정권 때 대통령긴급조치 위반과 내란선동,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수감된 고 지학순 주교가 1974년 9월11일 동료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말이다.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지 주교는 지난해 9월 검찰이 청구한 재심(1차 재심)을 통해 긴급조치 위반에 대해서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재심 사유에 긴급조치 위반 혐의만 포함시켜 내란선동과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는 제대로 된 심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지 주교의 내란선동 혐의는 1973년 11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된 김지하 시인을 만나 총 108만원을 줘 내란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정작 돈을 받은 김 시인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재심이 이뤄지지 않은 지 주교의 내란선동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조카인 지씨가 새롭게 재심을 청구했다. 검사가 청구하지 않은 내란선동 등에 대해서도 유무죄를 가려달라는 취지이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제424조는 재심청구권자로 검사, 유죄를 선고받은 자, 배우자·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로 규정한다. 1993년 작고한 지 주교에게는 배우자나 직계친족, 형제자매가 없다. 형사소송법상 재심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조카 지씨는 새로운 재심을 청구하면서 재판부에 재심 청구인의 자격을 제한한 법 조항의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한 상태다.

1950년 월남하며 가족들과 헤어진 지 주교에겐 동생 지학삼씨가 남쪽에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고, 그 동생의 아들이 지용씨다. 지씨는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큰아버지인 지 주교를) 찾아뵙곤 했다”며 “‘정치인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며 쓴소리하신 게 기억에 난다”고 했다. 지씨 측 대리인 김형태 변호사는 “민법상 방계혈족인 조카는 상속인에 해당된다”며 “상속인으로 형사보상이나 국가배상을 청구할 자격은 있는데, 그 전제 조건인 재심은 청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지씨가 청구한 재심과는 별개로 1차 재심의 항소심도 진행 중이다. 내란선동 등 혐의로 무죄를 내려달라고 지 주교 측이 항소한 것이다. 지난 18일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지 주교 측 국선변호인은 “내란선동 등 혐의에 재심 청구가 인용되기 어려운 상황을 참작해 긴급조치 위반 외 다른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했다. 검찰은 “(지 주교 측의) 항소를 기각해달라”고 했다.

항소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1부 재판장 이승련 부장판사는 지씨가 낸 2차 재심사건에 대해 전해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이니 직계비속(자녀)이 없겠군요. 형제 분들은 돌아가셨을 테고….” 항소심 선고 공판은 오는 10월8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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