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법정 입찰비리' 공익신고자에 손해배상 소송 낸 대법원

전현진 기자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 추적보도 첫 기사가 실린 경향신문 2018년 8월13일자 1면.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 추적보도 첫 기사가 실린 경향신문 2018년 8월13일자 1면.

대법원이 약 1293억원 규모의 전자법정 입찰비리를 언론에 제보한 공익신고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입찰비리 연루 업체에서 일하다 비리 사실을 제보해 대법원의 추가 피해를 막는 데 기여한 신고자에게 입찰비리로 발생한 손해를 배상하라고 나선 것이다.

28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 6월25일 전자법정 입찰비리 관련 업체 4곳과 관계자 5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5명의 피고 중에는 입찰비리 사실을 제보한 이모씨가 포함됐다.

전자법정 입찰비리는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구입하는 등의 수법으로 현직 법원행정처 공무원들이 전직 법원 공무원이 만든 업체와 짜고 예산을 빼돌린 일이다. 입찰비리로 대법원은 시세보다 비싸게 필요한 장비를 사들였다. 형사재판 1심에서 인정된 계약금액과 뇌물·횡령액 등을 모두 더하면 1293억5175만원에 이른다.

이 업체에서 일했던 이씨는 경향신문에 이 일을 제보해 대법원의 내부비리를 세상에 알렸다. 이씨는 당초 감사원에 입찰비리를 신고하려다 ‘대법원은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언론사에 제보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국회 차원의 공론화에도 나섰다.

2018년 8월13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 이후 검찰 수사가 시작돼 법원 공무원과 업체 관계자 18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총 14명이 징역 8년 등 유죄를 확정받았다. 제보자 이씨도 입찰비리에 관여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됐지만 2019년 12월 항소심 재판부는 선고를 유예했다. 재판부는 “구조적 비리에 가담했으나 공범이기에 내부비리를 제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비밀리에 저질러지던 범행의 전모가 밝혀지게 됐다”고 이유를 밝혔다. 형사재판에서 선고유예 처분은 사실상 무죄나 다름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법원행정처는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 가운데 우선 5명을 상대로 지난 6월 소송을 제기하면서 선고유예가 확정된 이씨까지 손해배상 청구 대상에 포함시켰다. 범죄와 비리를 막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에게 금전적인 배상을 받겠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이씨가) 법률상 공익신고자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공익신고자라 하더라도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면제하는 법 규정은 없다”면서 “손해배상책임이 있는지와 그 범위에 대해 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정책적 결정을 한 것”이라고 했다. 공익신고자도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지 보려고 공익신고자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취지이다.

2018년 12월18일 대법원의 전자법정 사업 입찰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현직 공무원들의 연루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을 압수수색 했다. 사진은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이 있는 경기도 성남시 대법원전산정보센터 모습. 연합뉴스

2018년 12월18일 대법원의 전자법정 사업 입찰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현직 공무원들의 연루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을 압수수색 했다. 사진은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이 있는 경기도 성남시 대법원전산정보센터 모습. 연합뉴스

공익신고자보호법 14조에 따르면 공익신고자의 범죄행위가 발견된 경우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고, 피신고자는 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발간한 <공익신고자보호법 조문별 해설서>에서는 ‘책임 감면’에 대해 “자진신고 유도를 통한 공익침해 행위 시정을 위해 감면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씨는 이 법에서 정한 기관 등에 공익신고를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같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 사건에서 법원은 재판의 주체이기 앞서 사건의 당사자”라며 “장기간 이뤄진 입찰비리에 수십 명이 가담했는데, 그 중 소수에 대해서만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도 유독 공익신고자를 포함한 것이라면 더더욱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 “법원의 이번 조치는 공익신고를 하면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게 될 것이라는 신호를 주는 셈”이라며 “앞으로 누가 공익신고를 하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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