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국가배상' 판례 변경 압박하는 하급심…고민 길어지는 대법원

전현진 기자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동관련 경향신문 1975년 5월 14일자 1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동관련 경향신문 1975년 5월 14일자 1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으로 피해를 본 이들이 최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하급심에서 승소했다. 하급심이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판결을 내놓으며 판례 변경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22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재판장 황순현)는 김명식 시인에게 국가가 2억4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지난 20일 선고했다. 김 시인은 예수회 수사 생활을 하던 중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해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1977년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이 확정됐었다.

재판부는 “위헌적 긴급조치의 발령과 그에 따른 일련의 국가작용으로 발생하는 개별 공무원의 행위는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했다. 김 시인 사건을 대리한 이정일 변호사는 “긴급조치 관련 국가배상 소송의 여러 쟁점들의 취지를 밝혀주는 깔끔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판결은 사실 대법원 판례에 정면으로 반한다. 2015년 3월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이 위헌·무효라면서도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어도 “국민 개개인에 대한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은 지지 않는다”며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이 판결에 대해선 당시에도 비판이 이어졌다. 대법원 선고 6개월 뒤인 2015년 9월 서울중앙지법은 긴급조치 제9호 발령행위가 헌법 문언에 명백히 위배돼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고의 내지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판례와 반대되는 결론이다. 이후 이처럼 하급심에서 판례를 거부하며 긴급조치 발령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이어졌고, 대법원은 2015년 판례를 근거로 하급심 판결을 기각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자 대법원은 최근 관련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심리하고 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 제9호 발령행위 자체 또는 이에 따른 공무원들의 직무행위가 민사상 불법행위가 될 수 있는지. 쟁점은 같다. 다수의견으로 다른 결론이 나오면 판례가 변경된다. 긴급조치변호단에서 활동한 이상희 변호사는 “그동안 9차례 심리가 열렸다. 전원합의체에서도 심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쉽게 결론이 안 나오는 것 같다”며 “그동안 진행 중인 손해배상 소송은 대부분 연기된 상태다”라고 했다.

판례가 변경돼도 이미 패소가 확정된 이들은 배상받을 길이 막막하다. 윤진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판례가 변경돼도 손해배상 청구가 이미 기각된 분들은 사법절차로는 구제 받을 길이 없다”며 “구제하려면 특별법 등 입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단법인 긴급조치사람들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된 건 200여명에 이른다. 현재 하급심과 대법원에서 소송 계속 중인 이들은 187명이다. 지난해 11월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아직도 입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긴급조치 국가배상' 판례 변경 압박하는 하급심…고민 길어지는 대법원

Today`s HOT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APC 주변에 모인 이스라엘 군인들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400여년 역사 옛 덴마크 증권거래소 화재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장학금 요구 시위하는 파라과이 학생들 케냐 의료 종사자들의 임금체불 시위 2024 파리 올림픽 D-100 솔로몬제도 총선 실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