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전달하는 건 죄 아닐 것 같다'?...그러다 ‘독박’ 쓴다

박용필 기자
'돈만 전달하는 건 죄 아닐 것 같다'?...그러다 ‘독박’ 쓴다

‘누군가한테 가서 서류를 보여주고 돈을 받아다 통장에 넣어주면 10만원을 주겠다’는 ‘채권 회수 알바’ 광고가 있다. 이 알바를 했다면? 경우에 따라 징역살이는 물론 10만원의 수십배가 넘는 돈을 물어줘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같이 처벌받는 경우가 최근 늘고 있다.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당해 피해자를 울리는 가해자가 되는 것은 물론, 주범 대신 ‘독박’을 쓰기도 한다.

■계좌이체는 옛말…진화하는 보이스피싱

A씨는 지난해 3월 휴대전화 구직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서류를 전송해줄테니 출력해 누군가에게 가서 보여주고 돈을 받아다 지정된 계좌에 입금해주면 일당 15만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2300여만원을 받아 의뢰인이 지정한 통장에 넣었고, 3일치 수당 49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지난 8월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에서 사기와 사기 미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피해자에게 1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형사배상명령도 받았다. A씨는 범죄인 줄 몰랐고, 자신이 챙긴 수익은 49만원에 불과하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B씨 역시 구직 앱의 ‘대부 업체 외근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고 일을 했다가 이달 초 같은 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B씨 역시 보이스피싱 범죄인 줄 몰랐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금액 중 일부가 회복된 점이 참작돼 형이 감경됐을 뿐이다.

최근 3~4년 사이 A씨나 B씨처럼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돼 처벌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이 ‘계좌이체형’에서 ‘대면 편취형’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30분 지연 이체’나 ‘지급정지제도’ 같은 금융권의 보이스피싱 예방 제도가 강화돼 계좌이체를 통한 범죄가 어려워지자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받아오는 수거책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 ‘계좌이체형’은 3만973건에서 지난해 1만822건으로 급감한 반면 ‘대면편취형’은 2547건에서 1만5111건으로 크게 늘었다.

■징역형에 배상책임까지

문제는 주범에게 이용당한 이들이 배상 책임까지 떠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당수는 자신이 보이스피싱 수거책인지 모르고 범죄에 가담한다. 그러나 법원은 ‘범죄일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정황이 있으면 범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판단한다. A씨의 경우 자신이 금융기관 직원이 아님에도 은행의 대출상환증명서 등을 피해자에게 제시하고 ‘금융기관에서 왔냐’는 피해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 때문에 재판부는 범죄임을 인식했을 가능성과 상대를 기망할 의사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B씨의 경우도 일에 비해 수당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 대부업체의 상호 등을 확인하지 않은 점 등이 범죄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정황으로 인정됐다.

대포통장이나 대포폰 개설에 명의를 제공한 경우 범죄임을 정말 몰랐다고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전자금융거래법은 대가를 기대하고 통장, 체크카드 등을 양도하는 행위 자체를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목적은 상관 없다. 만약 범죄임을 인식할 수 있는 정황이 있었다면 정도에 따라 사기방조죄는 물론 사기죄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

특히 사기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벌을 받게 되면 주범을 대신해 피해금액 전체를 물어내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취득한 이득과 상관없이 공동불법행위자로서 피해자의 손해액 전액을 배상할 책임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법원은 피해자의 과실이 없는 경우 전달책이나 수거책에 대한 형사배상명령 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A씨가 법원으로부터 자신이 챙긴 ‘수당’의 수십배에 달하는 금액을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이유다.

물론 주범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해외에 있는 주범들이 잡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지난해 검거된 보이스피싱 범죄자 3만9000여명 대부분이 ‘대면전달책’과 ‘수거책’, ‘대포통장 명의 제공자’들이다. 사건을 지휘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주범은 2.1%에 불과했다.

■‘돈만 전달하는 것’도 큰 죄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고수익 채권 회수 알바’ 등과 같은 광고를 통해 사람들을 유혹한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실직자나 취업준비생 등 청년층이 이 같은 유혹에 주로 노출된다. 2020년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된 ‘보이스피싱 전달책의 가담경로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전달책·수거책 2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0.6%가 구직 사이트를 통해 범행에 가담했다. 이어 지인소개를 통한 가담 15.3%, SNS를 통한 가담 6.4% 순이었다. 대상자의 77%는 30세 이하였고, 86%가 무직자였다.

보이스피싱 전달책으로 기소된 이들을 다수 변호했던 한 국선 변호인은 “경제적 곤궁함이나 ‘돈만 전달해주는 게 무슨 큰 죄가 되겠나’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며 “불법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하더라도 실제로 범죄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현금을 전달하는 행위도 보이스피싱의 중요한 역할에 해당하고 엄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외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보이스피싱 범죄 자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라도 이런 점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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