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사주 ‘실체’는 있지만 ‘주체’는 모른다는 미완의 수사읽음

이효상·허진무 기자

용두사미로 끝난 공수처의 8개월 수사

고발 사주 ‘실체’는 있지만 ‘주체’는 모른다는 미완의 수사

대선 후보 경선 한창일 때 불거져…윤석열 “정치 공작”
신생기관 한계 노출하며 공소유지 과정도 험난할 전망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4일 ‘고발 사주’ 의혹이 불거진 지 8개월 만에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손준성 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현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고발 사주의 실체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검찰 윗선의 개입 여부를 규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수사력을 총동원하고도 ‘손 검사가 김웅 국민의힘 의원에게 고발장을 전달했다’는 제보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다. 수사가 탄탄하지 못한 탓에 공소유지도 험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발 사주 의혹은 각 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9월 뉴스버스의 보도로 불거졌다.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대검에서 근무하던 손준성 검사가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후보였던 김웅 의원에게 범여권 정치인과 언론인에 대한 고발장을 전달해 야당의 고발을 사주했다는 것이 의혹의 골자였다. 윤석열 당선인의 검찰총장 재임 시절 벌어진 일인 데다 당시 손 검사가 검찰총장의 ‘눈과 귀’로 불린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이었던 점, 문제의 고발장이 윤석열·김건희·한동훈 3인을 명예훼손의 피해자로 적시한 점, 미래통합당 내에서 고발장이 유통되는 과정에 검찰 출신인 김웅·정점식 의원이 관여한 점 등으로 인해 검찰 윗선의 관여 의혹, 국민의힘의 조직적 공모 의혹이 제기됐다.

시민단체 고발에 공수처는 윤 당선인 등을 입건하고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에 나섰다. 의혹 규명의 첫 관문은 손 검사였다. 손 검사가 김웅 의원에게 고발장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고발장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작성했는지, 누가 고발장 작성을 지시했는지, 대검 윗선이 이 과정에 관여했는지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운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차장이 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고발 사주’ 사건 수사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운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차장이 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고발 사주’ 사건 수사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8개월의 수사 끝에 공수처는 손 검사가 김 의원에게 문제의 고발장을 전달했다고 결론내렸다. 이 사건 제보자 조성은씨가 김웅 의원에게 받은 텔레그램 메시지상의 ‘손준성 보냄’ 문구, 고발장 전달을 전후해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 직원들이 판결문을 검색한 기록 등이 근거였다. “괴문서” “정치공작”이라는 윤 당선인의 주장과 달리 의혹의 실체가 있다고 본 것이다.

법정에서 혐의가 인정된다면 검찰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이 확인되는 셈인 만큼 검찰총장이던 윤 당선인도 부하 검사에 대한 관리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사는 그 이상으로 뻗지 못했다. 고발장 작성자를 특정하는 데 실패해 윗선의 관여·공모 여부를 규명하지 못했다. 수사의 핵심인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는 피의자 전원이 무혐의 처분됐다. 공수처 관계자는 “고발장 작성자를 특정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수사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작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을 했는지는 다른 문제”라고 했다.

고발 사주 사건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겨눔으로써 공수처의 실질적 1호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신생 수사 기관의 부족한 수사력 등 문제가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손 검사, 김 의원 등이 모두 입을 닫아 ‘말’보다 ‘물증’이 중요했지만 공수처는 이렇다할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피의자이면서 수사 전문가인 검사들로부터 압수수색 절차의 위법성 문제 등을 역공받아 수사가 위축되기도 했다.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1년6개월 뒤 수사가 시작된 점도 물증 확보를 어렵게 했다. 대검 수정관실의 자료는 대부분 삭제된 뒤였고, 주요 피의자들은 휴대전화를 교체한 뒤였다. 손 검사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 때 자신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해제하는 데 협조할 뜻을 밝혔지만 이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공수처의 출석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의혹의 실체만 간신히 확인한 채 손 검사를 재판에 넘긴 탓에 공소유지 과정도 험난하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더구나 손 검사는 누군가 보내온 고발장을 단순 반송했을 뿐이라며 고발장 전달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터다. 지난달 19일 공수처 공소심의위원회는 손 검사에 대한 불기소를 권고했다.

법리다툼도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공수처는 손 검사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공무상비밀누설 등 혐의를 적용했다. 손 검사가 김 의원에게 보낸 1차 고발장은 고발로 이어지지 않았고, 2차 고발장은 총선 이후인 2020년 8월 고발이 이뤄졌다. 총선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는 셈이다. 언론 보도 내용 등이 담긴 고발장을 공무상 비밀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도 다툼이 예상된다. 공수처 관계자는 “공무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를 했다면, 그 자체에 대해 범죄가 성립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라며 “(고발장은)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이라는 지위가 없었다면 수집되지 않았을 정보들”이라고 설명했다.

손 검사 측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정치적 고려만으로 사건을 무리하게 처리했다”며 “(공수처가) 정치검사의 길로 걷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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