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8년 만에 ‘국가폭력’ 확인…“기지촌 문제의 끝 아닌 시작”

김희진 기자

대법, ‘미군 기지촌 성매매’ 한국 정부 책임 첫 인정

과거 주한미군 기지촌 성매매에 대한 한국 정부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원고 김모씨가 발언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과거 주한미군 기지촌 성매매에 대한 한국 정부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원고 김모씨가 발언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성매매 지역 설치, 성병 검사 강제…“여성 존엄성 침해” 판시
피해자들 ‘눈물’…관련단체들 “정부 사과·후속조치 취해야”

김숙자씨(77)는 12세에 가난과 부모의 구박을 못 이겨 고향인 목포를 떠났다.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전전하다 충북 진천에서 기지촌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김씨 나이는 19세. 성환, 김제, 태안, 평택…. 전국 곳곳 기지촌을 떠돌다 보니 59세가 됐다. 생계를 잇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양공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인 세월을 살며 김씨는 멸시와 차별을 견뎌야 했다. “오늘 우리 할머니들 손을 들어준 판결을 내주셔서 눈물이 납니다.”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선 김씨가 말했다.

대법원은 이날 김씨를 비롯해 주한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기지촌을 운영하고 성매매를 조장한 정부 책임을 인정했다. 기지촌이 처음 조성된 1957년으로부터 65년,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2014년으로부터 8년 만이다.

소송을 시작할 때 120여명이 모여있었지만, 24명은 대법원 판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 등이 거쳐온 기지촌 접객 업소 등은 1957년 유엔군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할 시기가 되자 주한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를 일정 지역에 집결시키기로 정부가 결정하면서 조성됐다. 당시 정부는 성매매 영업이 가능한 ‘특정 지역’을 설치하고, 성매매를 하는 여성에게 주 2회 성병 진단을 받게 하는 등 사실상 성매매를 조장했다.

성병 검진을 기피하는 여성은 보건소와 경찰이 이른바 ‘토벌’로 불리는 단속에 나섰다. 양성 진단을 받은 여성은 수용소에 강제로 격리됐다. 격리된 여성에게 제대로 된 진단 없이 페니실린 주사를 놔 부작용으로 쇼크사하는 일도 일어났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애국교육’을 실시한 것으로도 조사됐다.

대법원은 이날 기지촌을 조성·운영하고, 성매매를 조장한 것이 정부가 주도한 국가폭력이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정부의 행위는 위법했고,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존엄성을 침해했으며, 그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자발적으로 기지촌에 들어온 경우에 대해서도 정부의 배상책임이 있다고 본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정부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과거사정리법에 따른 ‘국가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보고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원고들을 비롯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등은 이날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김민문정 한국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정부는 판결을 인정하고 피해 생존자들에게 책임 있는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후속조치로 피해 여성들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 사과,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 문제를 해결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과 조례 제정 등을 촉구했다. 21대 국회에선 ‘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으나 아직 법안심사소위조차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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