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 디딤돌 판결은 ‘불법파견→기간제는 위법’ 대법 판결읽음

김희진 기자

민변·경향신문 2022년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경향신문은 2년 넘게 파견직으로 일해 직접 고용해야 하는 노동자를 기간제로 채용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본 대법원 판결을 2022년 최고의 디딤돌 판결로 선정했다.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는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 영상진술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 헌법재판소 결정과 파업에 단순 참가한 노동자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판단을 고수한 헌재 결정이 공동으로 선정됐다.

‘2022년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위원회’는 민변 각 위원회 등이 추천받은 각급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결정을 심사해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을 선정했다. 지난해 11월1일부터 올해 10월31일까지 나온 판결과 결정을 대상으로 했다. 사건의 특징, 기존 판례와의 견해 차이, 사회에 미친 영향, 인권 증진 기여도 등을 주요 심사 기준으로 삼았다.

선정위원회 위원장은 김수정 변호사(전 민변 부회장)가 맡았다. 랄라 활동가(다산인권센터), 소주 활동가(커뮤니티 알), 장예정 사무국장(천주교인권위원회)와 박은정 교수(인제대학교 법학과), 이지현 사무처장(참여연대), 임지봉 교수(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유신혜 변호사(민변 사무차장), 서채완 변호사(민변 사무차장), 김희진 기자(경향신문)가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민변은 5일 ‘한국인권보고대회’를 열어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결과를 발표하고 주요 인권 현안에 대한 토론회를 갖는다.

“2년 넘게 일한 파견노동자, 기간제 고용은 위법” 비정규직 돌려쓰기 ‘꼼수’ 제동

서울 서초동 대법원  /박민규 선임기자

서울 서초동 대법원 /박민규 선임기자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지난 1월 TJB대전방송에서 파견노동자로 4년간 일한 최모씨가 방송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해고가 정당하다고 본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개정 파견법에서 파견기간 2년이 지난 노동자를 사용자가 직접 고용할 때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대법원이 구체적으로 판단한 첫 판례였다.

최씨는 TJB대전방송에서 2006년부터 아르바이트 4년, 파견노동자로 4년 등 약 10년간 일했다. 2007년 시행된 개정 파견근로자보호법(파견법)은 ‘2년 넘게 파견노동자를 사용한 경우 원청 사업주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고있다. 대전방송은 규정에 따라 4년간 파견노동자로 일한 최씨를 2014년 직접 고용했지만,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이 아니라 1년짜리 기간제로 채용했다. 최씨는 계약기간을 한 번 연장해 2년 더 일한 후 2016년 계약이 만료됐다.

그는 파견법에 따라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할 때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이어야 한다며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원심은 대전방송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은 최씨를 기간제로 채용한 것은 위법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파견근로자를 직접 고용하면서 특별한 사정이 없음에도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한 경우 직접 고용의무를 완전히 이행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며 “근로계약에서 기간을 정했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효가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사측이 파견법을 위반해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할 때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정규직’ 내지 ‘무기계약직’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기간제로 고용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은 사업주가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선정위원회는 이 판결을 최고 디딤돌 판결로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선정위는 “불법파견 시 사용 사업주가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할 의무를 가짐에도 우회적으로 기간제로 채용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건 최초의 판결”이라며 “불법파견을 근절하고 직접 고용할 때 고용안정 등 파견근로자를 더욱 두텁게 보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유영표 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 이사장 등 9호 조치 피해자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2022년 8월30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유영표 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 이사장 등 9호 조치 피해자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2022년 8월30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한수빈 기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발령과 이에 기초한 수사·재판이 위법하므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한 대법원 판단도 디딤돌 판결에 선정됐다. 대법원은 “위헌·무효임이 명백한 긴급조치 9호 발령에 따라 강제수사와 공소제기, 유죄판결을 통해 국민 기본권 침해가 현실화했다.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위법하다”며 “이로 인한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했다.

선정위는 “판결을 변경해 기존 판결의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소송 중인 피해자들이 구제됐다”면서 “국가배상 책임의 법리, 법령의 발동행위 및 법관의 불법행위 성립에 관해 국가 배상책임을 확장하는 등 진일보한 의견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판결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러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발생하는 등 ‘지연된 정의’라는 한계가 있어 최고의 디딤돌 판결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성정체성을 밝혔다가 고국에서 박해를 받은 말레이시아인 A씨를 난민으로 인정한 판결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성별 정체성에 따른 박해를 난민 인정 사유로 본 첫 판결이었다. 서울고법은 1심을 뒤집고 A씨에 대한 박해를 ‘신체·자유에 대한 위협,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나 차별이 발생하는 경우’라며 난민협약상 박해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난민법 취지에 따라 난민 인정 사유를 넓히고, 성소수자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뒤딤돌이 될 판결이란 평가를 받았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국회의원과 성소수자 인권단체회원들이 2021년10월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세계 커밍아웃의 날을 맞아 군형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기본소득당 용혜인 국회의원과 성소수자 인권단체회원들이 2021년10월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세계 커밍아웃의 날을 맞아 군형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동성 군인이 사적 공간에서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었다면 군형법 추행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동성 군인 간 성행위는 무조건 처벌대상으로 본 2008년 대법원 판례를 14년 만에 변경한 판단이었다. 교정시설에서 수용자를 과밀하게 수용한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는 위법한 행위라고 본 판결 역시 과밀수용의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례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직원을 전보다 직급·권한이 낮은 직무로 발령한 것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뒤늦게 제출한 검사의 잘못에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선거기간 내 선거에 영향을 주는 집회·모임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조항은 위헌이라는 헌재 결정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록을 예외없이 비공개한 것은 위헌이라는 헌재 결정 역시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한 전 기무사 간부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하급심 판단도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비정규직·소수자·수용자 문제를 다룬 하급심 판결들도 의미있는 판결로 주목받았지만 디딤돌 판결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기간제 교원을 차별대우한 데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서울중앙지법 판결, 혼거수용 위법성을 인정한 전주지법 판결, 동대문구청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퀴어여성네트워크의 대관을 취소한 행위는 차별에 해당한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서울서부지법 판결 등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화한 점을 평가받아 후보에 올랐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영상진술 위헌·단순파업도 업무방해죄…최악의 걸림돌 판결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서울해바라기센터 진술조사실, 이곳을 방문했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다. 전현진 기자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서울해바라기센터 진술조사실, 이곳을 방문했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다. 전현진 기자

지난 1년간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는 헌재 결정 두 건이 공동으로 선정됐다. 만장일치로 성폭력 피해 아동의 진술영상을 재판 증거로 쓸 수 없도록 한 결정, 단순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것은 합헌이라는 결정이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헌재는 지난해 12월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담은 영상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해온 법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이 조항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성폭력 범죄 피해 아동은 법정에 다시 불려나와 자신이 겪은 피해를 반복해 진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선정위는 “진술영상에 대해 증거를 부인할 경우 미성년 피해자가 예외없이 법정으로 소환되고 있고 영상에 의해 성폭력 범죄가 입증된 사건도 연이어 대법원에서 파기됐다”며 “아무런 제도적 완충장치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입법 공백 상태가 초래됐으며 2차 피해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연합뉴스

헌재는 비정규직 해고에 항의하며 휴일근무를 거부한 노동자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법 조항이 합헌이라는 판단을 내놓았다. 심리에 착수한 지 10년 만에 나온 결론이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방해 목적을 띠고 있음에도, 긴 시간을 끌어온 헌재가 과거 판단을 답습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선정위는 노동3권이 위축되는 현실을 방기한 데다, 오히려 단체행동권을 더욱 제한할 법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제한한 고용허가제를 합헌으로 판단한 헌재 결정도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다. 외국인고용법상 이주노동자는 사용자가 근로계약을 해지하거나 근로조건을 위반하는 등 법에 정해진 사유가 있을 때만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다. 헌재는 “불법체류자가 급격히 늘어나 외국인근로자의 효율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합헌 사유를 밝혔다. 선정위는 “이주노동자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 걸림돌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선정하자는 의견도 제시됐으나 논의 끝에 걸림돌 판결에만 포함됐다.

성소수자 부부 소성욱·김용민씨가 2022년 1월7일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청구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소수자 부부 소성욱·김용민씨가 2022년 1월7일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청구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은 서울행정법원 판단도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는 현행법상 ‘혼인’은 남녀간 결합을 전제할 뿐 동성간 결합까지 확장 해석할 근거가 없다며 소송을 낸 두 사람 관계를 사실혼 관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회보장 영역에서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 자체에 무관심하고 문제의식이 결여된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선정위는 “판결문에서 국제적 추세를 거론하며 혼인을 ‘이성간 결합’으로만 볼 수 없다고 법원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입법 미비를 이유로 ‘동성 간 사실혼’에 대한 해석·판단을 유보하고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버스회사가 장애인을 위한 저상버스를 제공할 의무는 부담하지 않는다고 본 대법원 판단도 걸림돌 판결에 선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버스회사가 휠체어 탑승설비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행위라고 판단하면서도, 버스회사에 저상버스 제공 의무까지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또 탑승설비 등 편의를 제공할 범위를 모든 노선이 아닌, 차별구제 소송을 낸 원고들이 이용할 개연성이 있는 노선으로 제한해 퇴행적 판결이란 비판을 받았다.

경기 수원시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수원역에서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2022년 2월22일 장애인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 수원시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수원역에서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2022년 2월22일 장애인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정위는 “원고들이 모든 버스 노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해 장애인이 언제 어디서든 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한 차별적 판결”이라고 했다. 지하철 단차(승강장과 지하철 사이의 간격)에 대해 장애인 차별구제소송을 낸 당사자에게 소송비용을 부담하도록 한 서울고법 결정도 걸림돌로 선정됐다.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소송에도 패소자 부담 원칙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비의료인의 문신 시술을 처벌하는 조항은 합헌이라는 헌재 결정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재외선거사무를 중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결정에 대한 헌법소원을 기각·각하한 헌재 결정 ◇영사통보권 고지없이 외국인을 체포해 증거수집에 절차적 하자가 있음에도 유죄를 확정한 대법원 판결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전월세 계약갱신 거절 사유인 ‘임대인의 실거주 목적’을 임차인이 증명하도록 한 1심 판결 등이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세월호 참사 보고시간 조작 사건 책임자였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대법원 판결도 문제가 많다는 의견이 있었다. 다만 일부 유죄를 인정한 하급심 판결을 과거 걸림돌 판결로 꼽았기에 올해 걸림돌 판결에는 선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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