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행위·개인 청구권·소송 시효…모든 쟁점서 ‘피해자 승리’

김혜리 기자

쟁점별 판결 내용 보니

<b>웃음 찾은 피해자</b>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이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웃음 찾은 피해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이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법원 ‘베트남 피해자 측 한국에 소송할 권리 있다’ 판단
학살서 생존한 ‘원고’ 응우옌 “74명 영혼도 기뻐할 것”

대한민국 법원은 7일 응우옌 티 탄(63)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책임을 최초로 인정했다. 한국 정부는 너무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이고 한국군의 불법행위가 있었는지도 입증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의 쟁점 중 하나는 한국군이 자행했다는 불법행위의 입증 여부였다.

원고인 응우옌은 베트남전 때인 1968년 2월12일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군인들이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 74명을 학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본인은 중상을 입었고 가족은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삼촌인 응우옌 득 쩌이도 법정에 출석해 평소에 한국군을 여러 차례 만나서 한국말을 구별할 수 있었다며 그날 퐁니 마을 주민을 죽이고 방화한 이들이 “한국군임을 알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퐁니·퐁넛 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한 한국 참전군인까지 법정에 출석해 학살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재판에서 한국 정부는 베트콩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거나, 북한 심리전 부대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한국 군복을 입고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해자가 한국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한국군이 가해자가 맞고, 응우옌의 가족이 피해를 본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사건 당일 대한민국 해병 제2여단 1중대 소속 군인들이 방공호에 있던 응우옌의 가족을 수류탄과 총으로 위협해 나오게 했으며, 한국군이 총격을 가해 이모와 언니 등 가족들이 현장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응우옌에게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는지도 쟁점이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으로부터 입은 피해에 대해 한국 법원에 소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1965년 한국과 월남 간에 체결된 ‘한·월 군사실무 약정’을 근거로 들었다. 약정에 따르면 월남 측은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보았을 경우 양국 간 별도 협상을 거쳐 보상받을 수 있는데, 응우옌은 이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응우옌 측은 현재 유효한 1969년 개정 약정에선 ‘개인 청구권에 영향이 없다’고 분명히 돼 있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한국과 월남, 한국과 미국 군사당국 사이에 체결된 실무약정은 기관 간 합의에 불과하다”며 “베트남 국민인 원고의 청구권을 배제하는 법적 효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에 한국의 국가배상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도 쟁점이었다. 재판에서 한국 정부 측은 대한민국 국가배상법이 아니라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 1968년 당시 남베트남 민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응우옌 측은 대한민국 공무원이 불법행위를 했을 때 그 손해배상을 규정하는 유일한 법은 국가배상법이라며 이번 사건에도 대한민국 국가배상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남베트남이 1975년 패망해 당시 민법의 존재 여부와 내용이 불확실하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도 한국의 국가배상법을 적용할 수 있다며 응우옌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불법행위 시점이 수십년 전이라 소멸시효가 만료됐다는 정부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응우옌이 소를 제기할 때까지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정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건 권리 남용에 해당한다”고 했다. 민법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와 가해자를 피해자가 안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소멸한다. 다만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거나 채권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큰 경우’ 예외가 인정된다.

응우옌을 대리한 민변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태스크포스(TF)’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소감을 밝혔다. 임재성 변호사는 “지금껏 그 어떤 대한민국 기구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행정부, 의회도 인정하지 않았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도 조사 개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며 “사법부가 최초로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불법행위가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사과문 1호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유사한 피해를 입은 베트남인들의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임 변호사는 베트남 정부가 해당 소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며 “사실상 용인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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