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부부’ 선 그었지만 사회보장제도 안으로 첫 편입

김희진 기자

재판부, 피부양자 제도 ‘법적 가족’ 한정한 건보 주장 반박

“소수자, 다를 뿐 틀리지 않아” 사회적 쟁점에 이례적 의견

1심과 같이 ‘사실혼’은 불인정…‘법적 지위’ 여전히 취약

<b>사랑은 평등하다</b> 동성 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21일 소송을 제기한 소성욱·김용민씨 등이 서울고법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제공

사랑은 평등하다 동성 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21일 소송을 제기한 소성욱·김용민씨 등이 서울고법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제공

김용민씨와 소성욱씨는 21일 서울고법 대법정에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1심 판결을 취소한다.” 10초 만에 끝난 항소심 판결 선고에서 법원은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인 김씨의 피부양자로 소씨를 인정했다. 소송을 시작한 지 2년 만이다. 두 사람 얼굴에 이내 미소가 번졌다. 2019년 5월 결혼한 두 사람은 어느새 ‘5년차 부부’가 됐다.

법정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은 서울고법 앞에서 나란히 ‘사랑’이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보라, 빨강, 노랑…. 가지각색의 ‘사랑’ ‘평등’ 팻말을 든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섰다. 소씨가 말했다. “우리의 사랑이 이겼습니다. 앞으로도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 이길 겁니다. 마치 사랑이 혐오를 넘어서듯 세상은 이미 변했고, 변하고 있고, 더 변할 겁니다.” 두 사람은 ‘차별’이 적힌 팻말을 찢어 허공에 뿌렸다.

법원이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이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법률상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 커플이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을 길이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고법 행정1-3부(재판장 이승한)는 소씨와 김씨 부부를 사실혼 관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 관계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한 차별”이라고 명시했다. 성적 지향에 따라 상대방의 성별만 다를 뿐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라는 점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사실혼 부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부양자 제도의 의미와 목적을 고려한 비교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건강보험법상 ‘이성 배우자’와 ‘동성 커플 상대방’이 같은지 판단하려면 “직장가입자와 혼인의 실질에 대응하는 합의하에 밀접한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 관계에 있고, 직장가입자에게 주로 생계를 의지하고 있으며, 소득 및 재산이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기준 이하일 것”인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이성 배우자’와 ‘동성 커플 상대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건보공단 측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동성 커플은 사실혼 관계가 아니어서 피부양자 자격도 인정할 수 없다고 본 1심과는 판단 기준 자체가 달랐다.

재판부는 피부양자 제도가 가족법 체계와 ‘가족’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건보공단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부양자 제도가 가족에 대한 부양을 토대로 설계되기는 했지만 건보공단은 이미 민법상 가족이 아니거나 부양 의무가 없는 이들에게도 직장가입자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등 ‘법률적 가족’에 한정하지 않고 제도를 운영해왔다는 것이다. “시대상황 변화와 사회보장 차원에서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할 생활공동체 개념이 기존의 가족 개념과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재판부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기존의 차별들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남아 있는 차별들도 언젠가는 폐지될 것”이라면서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고 했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사실관계나 법리 해석이 아닌, 사회적 쟁점에 대한 의견을 덧붙인 것은 이례적이다.

이호림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활동가는 “사법부가 성소수자 가족의 차별 상황을 인정하고, 모든 성소수자 가족들이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나아갈 길에 한 단계 디딤돌을 놓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1심과 같이 김씨와 소씨 부부의 사실혼 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부부를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로 볼 수 있다면서도 “두 사람 사이 사실혼이 성립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남녀의 혼인’만을 허용하는 민법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등에 따르면 혼인·상속·자녀 양육 등 가족관계에 따라 인정되는 민법상 권리와 의무를 이들에게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재판부는 김씨와 소씨의 관계에 대해 ‘동성 결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판결이 선고된 후에는 ‘동성 부부’ ‘동성혼’ ‘동성 배우자’란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전하기도 했다. “현행 법령의 해석론적으로 두 사람의 사실혼 관계가 인정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동성을 부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건강보험제도의 보호 범위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성 커플의 법적 지위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프랑스와 미국, 독일 등 서구 국가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다. 2019년에는 대만에서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일본은 도쿄 시부야·세타가야구 등 24개 지방자치단체에서 동성 파트너십을 등록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동성 간 관계를 보호하거나 보장하는 어떤 제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소씨와 김씨는 이날 판결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면서도 동성혼 법제화라는 근본적인 싸움을 다짐했다. 김씨는 “동성 부부의 평등한 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의 일환에서 오늘 마침내 승리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이어 “오늘 이 소송으로 얻어낸 권리는 혼인이 이뤄낼 수 있는 1000가지 권리 중 단 한 가지일 뿐”이라며 “1000가지 권리가 필요할 때마다 1000번 싸울 순 없다. 그래서 저희에겐 동성혼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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