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돋보기

죄송은 한데, 나쁜 마음 없었다?···징역 10년 구형에 울먹인 ‘세모녀 전세사기’ 모친읽음

김희진 기자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을 사는 일, 가능할까요? 집값과 전셋값이 동시에 오르던 시기엔 빌라를 중심으로 이런 일이 왕왕 벌어졌습니다. ‘무갭투자’라는 이름으로요. 집주인은 세입자한테 받은 전세보증금으로 집을 삽니다. 2년 뒤쯤 집값이 오르면 얻게 될 시세차익을 기대합니다. 세입자는 매매가와 같거나 심지어 매매가보다 높은 전세보증금을 냅니다. 이런 사정은 잘 모른 채로요. 빌라는 시세가 불분명한 데다, 누구도 세입자에게 설명해주지 않아서요.

그런데 2년 뒤 집값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돈이 없었습니다. 이 상황,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무갭투자를 시도한 집주인의 ‘사업 실패’일까요, ‘사기’일까요? 만약 집주인이 0원으로 사들인 집이 500채에 달하고 300명 넘는 세입자들에게 약 800억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했다면 단순 사업 실패로 볼 수 있을까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에서 한 가족이 무자본으로 수백채 빌라를 소유하고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 ‘세 모녀 전세사기’ 사건 얘기입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다수 발생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 밀집 지역의 모습. 한수빈 기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다수 발생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 밀집 지역의 모습. 한수빈 기자

올 들어 다섯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408호 법정엔 세 모녀 전세사기 사건의 주범인 모친 김모씨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이 재판은 마무리를 향해 갑니다. 김씨는 이날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검찰은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중형을 내려달라”며 김씨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책임은 있지만 고의는 아니었다”…사기 유무죄 가를 ‘고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김씨 입장은 한결 같았습니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건 유감이지만, 일부러 세입자를 속이려 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김씨 측 변호인은 최후변론에서도 “김씨가 임대차보증금을 원만하게 반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하고 민사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김씨에게 기망이 존재했는지 그 부분을 (재판부가) 다시 한 번 살펴봐주시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기망이 존재했는지, 즉 김씨가 세입자를 속였는지 또는 애초에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이 사건에서 핵심 쟁점입니다. 경계가 애매모호한 ‘전세사기’와 ‘보증금 미반환 사고’를 구분하는 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집값이 떨어지며 발생하게 된 예기치 못한 불운의 ‘사고’일 뿐이지, 일부러 세입자를 속인 ‘사기’가 아니라는 게 김씨 측 주장입니다.

김씨 측은 검찰의 공소사실 자체를 납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김씨는 임대인 지위를 승계받았기 때문에 피해자와 직접 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아니고, 피해자를 만난 적도 없어 김씨의 기망 행위가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은 건축주에게 지급돼 김씨가 빼돌린 게 없다고도 주장합니다.

검찰 “우연히 김씨 만나 큰 피해…피해회복도 어려워” 징역 10년 구형

반면 검찰은 “지금까지 김씨에 대한 유죄 증거를 충분히 제출했다”면서 “김씨의 기망 행위가 명백히 존재한다”고 일축했습니다. 검찰은 김씨가 애초부터 신축빌라 분양대행업자와 공모했다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이 짜고 임차인을 모집했고 분양대금을 웃도는 전세보증금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보증금 일부를 분양대행업자와 나눠 ‘리베이트’로 챙기기도 했고요. 김씨에 이어 분양대행업자 대표와 분양팀장, 김씨의 두 딸들도 공범으로 기소된 상태입니다.

무자본 갭투자 전세사기 유형 설명. 경찰청 제공.

무자본 갭투자 전세사기 유형 설명. 경찰청 제공.

검찰은 “피해자들은 그야말로 국가와 사법시스템의 보호가 필요한 서민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일반 사기 사건에서 보통 피해자들은 수익을 추구하며 투자 등 경제활동을 하다 피해를 입지만,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다르다는 겁니다. 검찰은 “피해자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 최소 조건인 주거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한 욕심없이 임대차 계약을 맺었는데 임대인이 김씨였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됐다”고 했습니다.

검찰은 이어 “매우 특수한 사건으로 피해자수와 피해금이 상당히 많고 본질적 피해 회복이 어려운 측면이 있어 사안 자체로 범죄가 매우 중하다”며 “세 모녀 전세사기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대표성을 가진 사례로, 선고형 역시 회자될 것이므로 적절한 형이 선고돼야 함은 두말할 것 없다”고 징역 10년을 구형했습니다.

“나쁜 짓 하려 한 적 없었다” 훌쩍인 김씨…진심일까, 악어의 눈물일까

재판을 마치기 전 김씨는 훌쩍이며 입을 뗐습니다. “피해자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들 키우며 9년 정도 해외생활을 하다 한국에 와서 아이들 이름으로 임대사업을 하고, 나중에 이걸 다 기여해서 작은 장학재단이라도 만들어서 그걸로 월급받고 일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울먹이는 김씨의 요지 역시 ‘고의가 없었다’였습니다. 당시 50억원가량의 아파트 두 채를 소유하고 있어 임대사업을 하다 문제가 생기면 팔아서 해결하려 할 정도로 충분한 변제력이 있었고, 100채 넘는 집은 임차보증금을 반환했다고 했습니다. 세입자들이 살고 있는 집이 압류되지 않도록 1년에 20억원에 달하는 세금도 착실하게 냈다고 항변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김영민 기자

서울중앙지방법원 /김영민 기자

김씨는 이어 “아이들 이름으로 잘 해보려고 그런 거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나쁜 짓을 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라며 “무엇보다 소중한 게 명예라고 자식들한테 가르쳤는데 이렇게 되어서 너무 죄송하고, 자식 인생을 이렇게 다 망쳐버릴 줄 몰랐습니다”고 했습니다.

김씨는 손을 떨며 말을 마쳤습니다. “은행 대출이 안 돼서 새 임차인을 구하는 것도 안 되고 매매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이러다보니 너무 힘들었지만…. 오늘까지 왔습니다. 저는 거짓말하고 살아보지도 못했고, 오히려 제가 돈을 떼였어도 그분들 잘못되게 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너무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피해자 없길 바란다” 증인석 섰던 피해자들…7월12일 1심 선고

수많은 피해자들은 김씨의 최후진술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피하지 못한 사업의 실패라는 김씨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앞서 이 법정에 증인으로 선 세입자들은 “김씨가 전세보증금으로 신축빌라를 분양받아 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땐 보증금을 돌려받기는커녕 김씨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 세입자는 보증금 돌려달라고 하자 오히려 김씨로부터 “집을 넘겨받아 살 생각이 있느냐”는 문자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검찰은 이 대목에서 리베이트를 받았던 김씨가 ‘물량 떠넘기기’까지 하려했다고 의심합니다. 또 다른 세입자는 “저희 같은 전세 피해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증인으로 나섰다”고 했습니다.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소속 회원이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하는 정부여당 규탄대회에서 ‘세입자는 살고싶다’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소속 회원이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하는 정부여당 규탄대회에서 ‘세입자는 살고싶다’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부동산 호황기에 통용되던 투자 방식이 실패한 결과와 막대한 피해자를 양산한 의도적인 사기 범죄, 법원은 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볼까요.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이준구 판사는 7월12일 판결 선고를 하기로 했습니다. 김씨는 같은 법원 형사26단독에서도 두 딸과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김씨는 처음 세입자 85명한테 183억원 상당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검찰의 보강수사로 피해자는 355명, 피해금액은 795억원으로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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