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돋보기

바람난 아빠가 죽었다, 내연녀에게 줄 위자료 남기고읽음

김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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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하면, 저랑 제 아이들이 남편이랑 바람난 여자한테 돈을 줘야 한대요. 이게 말이 되는 판결인가요?”

A씨는 지난달 한 판결문을 받은 뒤 겨우 끊었던 수면제 약통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죽은 남편의 내연녀가 A씨의 아이들을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이겨, 초등학생인 자녀들이 졸지에 아빠와 바람난 여성에게 돈을 지급해야 할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선고결과를 이해할 수 없었던 A씨는 인터넷에 글을 올렸고, 일부 커뮤니티에선 판결을 비판하는 여론이 불붙기도 했습니다.

상간 소송서 승소했지만··· 내연녀 “돈 돌려달라”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A씨는 2013년 남편 B씨와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예쁜 아이들도 두 명이나 생겼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싶다’는 A씨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B씨가 C씨라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B씨는 원룸을 얻어 집을 나가기도 했고, 둘째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A씨는 2018년 B·C씨를 상대로 ‘상간 소송’을 냈습니다. 둘이 불법행위를 저질러 본인의 가정이 파탄났으니 위자료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한 겁니다.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B씨와 C씨가 불륜관계였음을 인정하고, C씨가 A씨에게 약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B씨는 소송이 진행되던 중 사망해 판결문의 피고란에서 빠졌습니다.

C씨는 위자료를 지급한 직후 A씨를 상대로 구상금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대법원 판례에서도 언급되는 ‘공동불법행위자 부진정연대채무’ 개념을 끌어온 것인데요. 대법원은 2005년 “공동불법행위자는 채권자에 대한 관계에서는 연대책임을 지되, 이들에겐 각각 일정한 부담 부분이 있”으며, “공동불법행위자 중 1인이 자기의 부담 부분 이상을 변제해 공동의 면책을 얻게 하였을 때에는 다른 공동 불법행위자에게 그 부담 부분의 비율에 따라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해, B씨와 C씨는 ‘부정행위’를 저지른 ‘공동불법행위자’입니다. 잘못은 둘이 했는데 이를 혼자 책임지는 게 부당하니 본인이 A씨에게 지급한 돈 중 B씨의 몫으로 낸 일부를 돌려달라는 게 C씨의 주장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공동불법행위자인 B씨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하겠지만 B씨가 사망했기 때문에 B씨의 채무를 상속받은 A씨에게 소송을 건 것이죠. C씨는 A씨의 자녀들을 상대로도 구상금을 청구했습니다. 아이들도 B씨의 채무를 상속받았으니 그만큼 돈을 지급하라는 겁니다.

“죽은 남편·아버지 채무 상속했으니 구상금 내라”는 법원

법원은 두 사건 모두 C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우선 소송 자체를 각하해달라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A씨는 “C씨가 B씨와의 부정행위로 손해배상까지 한 인물인데, B씨의 사망으로 채무상속인이 된 아이들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하는 것은 손해배상제도의 취지에 반하고 소권 남용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제시된 증거만으로는 C씨의 소 제기가 신의칙에 위배되거나 공서양속에 반해 소권 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B씨와 C씨는 공동불법행위에 각각 5:5로 책임이 있으므로, A씨와 아이들은 C씨에게 위자료 중 절반인 1000여만원을 도로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A씨는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A씨의 청구는 기각됐습니다.

“제가 법 공부를 해본 적은 없지만, 법이란 게 상식 위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C씨의 소송 제기가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지 않는다는 법원 판단에 A씨의 목소리엔 허탈함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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