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출제 오류 논란 확산

실무위 ‘이상 없음’ 결론 뒤 학회에 자문 요청

강진구·곽희양·최상희 기자

이의신청 처리 ‘총체적 부실 심사’ 드러나

(1) 실무위 ‘이상 없음’ 결론 뒤 학회에 자문 요청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올해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의 이의신청을 처리한 과정은 ‘총제척 부실심사’ 논란을 키우고 있다.

평가원은 올해 3월 발표한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 기본계획’에서 이의신청에 대한 심사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이의신청 접수 단계에서부터 중대한 사안은 관련 학회에 자문을 요청하도록 절차를 바꿨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24일 경향신문 확인 결과 평가원에 세계지리 8번 문항 이의신청이 최초로 들어온 것은 수능 당일인 지난 7일이었다. 다수의 수험생과 일선 교사들이 언론 보도를 근거로 문항 지도 밑에 표시된 2012년도에는 정답과 달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유럽연합(EU)보다 총생산액이 더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평가원이 이를 중대한 이의신청으로 판단했다면 새로 바뀐 규정에 따라 학회에 자문을 요청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평가원은 1주일간의 이의신청 접수 기간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13일 출제위원(7명)과 평가원 연구자(3명)들이 과반수를 차지한 이의심사실무위원회(17명)를 소집해 ‘이상 없음’ 판정을 내렸다.

평가원이 외부에 자문을 요청한 것은 실무위 결정이 내려진 바로 다음날인 14일이었다. 이의신청 접수 후 1주일이 지나서야 학회에 자문을 요청했고 그것도 실무위에서 결론을 먼저 내린 뒤였다. 학회 입장에서는 실무위 결정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실제로 한국경제지리학회는 평가원의 자문 요청을 받자마자 바로 당일,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는 다음날 ‘출제에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2개 학회 모두 EU가 NAFTA보다 생산액이 더 많게 보이도록 실무위와 마찬가지로 2012년을 제외한 2007~2011년 통계를, 그것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아닌 물가상승률이 제거되지 않은 명목 GDP를 사용했다.

올해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에 대해 지난 14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자문요청을 받고 ‘이상이 없다’고 밝힌 2개 학회의 공문이다. 한국경제지리학회(위쪽)가 당일(14일),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는 다음날(15일) 보낸 공문에는 회의 일시, 참석자 이름, 담당자나 결재자가 모두 공란으로 비워져 있다.

올해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에 대해 지난 14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자문요청을 받고 ‘이상이 없다’고 밝힌 2개 학회의 공문이다. 한국경제지리학회(위쪽)가 당일(14일),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는 다음날(15일) 보낸 공문에는 회의 일시, 참석자 이름, 담당자나 결재자가 모두 공란으로 비워져 있다.

각 학회에서 보낸 공문은 담당자·결재자의 이름이 모두 공란으로 비어 있고 누가 어떤 회의를 열어 공문을 작성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평가원은 실무위 결정이 내려진 후 중대한 사안의 경우 소집하게 돼 있는 이의심사위원회도 열지 않고 논의를 끝냈다.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의 한 부회장은 “회장이 전화로 학회 회원 3명과 의견을 수렴한 결과를 보내와 내가 공문 내용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복잡한 문제를 전화로 의견을 모으고 더구나 실무위의 ‘이상 없음’ 판정에 관여한 사람이 학회의 의견을 정리한 공문을 작성한 것이다. 2개 학회의 자문은 실무위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사후 요식행위라는 논란이 불거진 이유다.

<강진구 기자 kangjk@kyunghyang.com>

(2) ‘교과서 밖 출제’ → ‘교과서 수준선 이상 무’ 말바꾸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올해 사회탐구 영역의 출제 범위와 방향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수능 출제 전에는 ‘교과서 외에 시사적인 내용도 공부하라’고 했다가 세계지리 8번 문항의 출제 오류 문제가 지적되자 ‘교과서 수준에서 이상이 없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평가원이 올해 3월 펴낸 책자 <2014학년도 수능대비 영역별 평가목표, 출제방향 학습방법>에서는 사회탐구 영역의 출제 범위를 교과서로 제한하지 않았다. 책자는 “교과서 밖의 소재나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 및 시사적인 내용 등에서도 출제한다”며 교과서 내용만 단순 암기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공부방법에 대해서도 “사회탐구는 사회 현상과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비해야 한다”며 “언론매체 등에서 지리, 역사, 경제, 사회에 대한 기사를 읽고 의미를 파악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평가원은 세계지리 8번 문항의 정답이 최근 시사 흐름이나 통계와 배치돼 말썽이 일자 ‘교과서가 정답의 기준’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평가원은 지난 20일 수능 출제 오류에 대한 설명자료에서 “정오답을 판단하는 근거는 학문적 논의를 거쳐 교육과정의 범주에 안착된 교과서 내용만이 유일한 근거”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초 평가원의 공부방법에 대한 권고를 순진하게 믿고 교과서 외에 최근 언론 등에 나온 시사·통계 내용까지 공부한 학생들은 평가원의 이중잣대로 피해를 보게 된 셈이다.

<강진구 기자 kangjk@kyunghyang.com>

(3) 세계지리 8번 뺀 9개 문항은 제시 연도에 따라 풀이

세계지리 8번 문항 오류 논란의 근거 중 하나는 지도에 표시된 기준연도 ‘(2012)’다.

행정소송을 준비 중인 수험생들과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은 이 표시를 “기준연도를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대로 평가원 측은 ‘지도는 특정연도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고, 지역경제협력체의 회원국을 나타낸 것’이라는 해명자료를 내고 “2013년 크로아티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전, EU 회원국이 27개국임을 한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평가원의 설명은 설득력과 일관성이 약하다.

세계지리 8번 문항을 제외하고, 올해 수능 사회탐구 영역의 세계지리·한국지리 과목에서 기준연도를 제시하고 풀도록 한 문항은 총 9개다. 세계지리 4, 5, 14번과 한국지리 11, 13, 14, 18, 19, 20번 문항이다. 이 문항들은 모두 괄호 안에 표시된 연도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풀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세계지리 5번 문항은 2011년을 기준으로 국가별 에너지 생산량 비중을, 14번 문항은 2011년을 기준으로 세계의 식량 10대 수출국을 나타내는 식이다. 한국지리 11번 문항도 2008년을 기준으로 남북한의 농업을 비교했다.

평가원 측 설명대로라면 한국·세계지리에 연도를 표시한 10개 문항 중 9개는 표시된 연도를 기준으로 하면서, 세계지리 8번 문항만 2012년도를 제시하고 2009년 국제연감통계를 실은 교과서를 기준으로 하라고 한 셈이다.

이 문항 오류를 제기한 박대훈 전 EBS 강사는 “(2009년 통계자료를 인용한) EBS 교재에 연계되어 있는 문항을 그대로 수능에 옮기면서 나타난 오류를 인정하지 않은 채, 평가원 측이 끼워맞추기식 해명을 내놓다보니 이러한 불일치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곽희양·최상희 기자 huiyang@kyunghyang.com>

(4) 4년 전엔 ‘중대 사안’ 판단 재심 끝 ‘복수 정답’ 인정

역시 논란 끝에 복수 정답으로 처리된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지구과학Ⅰ 과목의 19번 문항에 대한 이의신청 절차는 올해 세계지리 8번 문항과 사뭇 대비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측이 세계지리 8번 문항을 처음부터 ‘중대사안(문제·정답의 오류, 교육과정 위배가능성이 있는 문항)’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능 출제 오류 논란 확산]실무위 ‘이상 없음’ 결론 뒤 학회에 자문 요청

2010학년도 지구과학Ⅰ 과목의 19번은 2009년 한국 부근에서 일어난 일식 현상에 대해 다뤘다. 제시된 답항 중 하나가 실제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일자 평가원 측은 이의신청 접수 후 학회와 전문가의 자문을 먼저 구했다. 자문단은 천문관측 분석프로그램으로 복잡한 계산과정을 거쳐 해당 문항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평가원은 곧바로 이의심사실무위원회에서 이 내용을 받아들였고, 재심 절차인 이의심사위원회를 열어 최종 확정했다.

반면 올해 세계지리 8번 문항은 이의심사실무위원회를 연 다음날 외부 자문을 구했다. 평가원 측은 “실무위원회를 먼저 여느냐, 외부 자문을 먼저 구하느냐의 순서는 규정상 정해져 있지 않다”며 “외부자문을 구하지 않고 실무위원회 결정으로 논의를 종료할 수 있었지만, 17명 중 1명의 소수의견이 있어 더 정확성을 기하고자 외부 자문을 구한 것”이라고 밝혔다. 평가원 측은 재심절차인 이의심사위원회에 이 사안을 이첩하지 않고 논의를 종료했다.

2010년 당시 평가원은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넘어서지만 과학적 사실에 부합하는 ①번을 함께 정답으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평가원이 올해 세계지리 문항에 대해 “2012년 NAFTA가 EU보다 생산액이 높다는 일부 발표가 있지만, 교과서와 EBS 교재에 EU의 총생산이 크다고 제시돼 정답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 것과 대비된다.

<곽희양·강진구 기자 hu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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