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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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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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미네르바 스쿨’ 설립

조창걸 태재재단 이사장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태재재단에서 조창걸 이사장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5000억원이 넘는 사재를 털어 다양한 공익사업을 벌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중인 그는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후손들이 살아갈 사회가 더 나을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자신의 한샘 지분(15.45%)과 특수관계인 등 지분을 사모펀드 운용사에 전량 매각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태재재단에서 조창걸 이사장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5000억원이 넘는 사재를 털어 다양한 공익사업을 벌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중인 그는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후손들이 살아갈 사회가 더 나을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자신의 한샘 지분(15.45%)과 특수관계인 등 지분을 사모펀드 운용사에 전량 매각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오전 8시. 조창걸 태재재단 이사장(83·전 한샘 명예회장)은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재단 5층의 테라스형 사무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책상 위에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직접 쓴 회고록 <약속의 땅>(원제 A promised land)이 3분의 2 정도 읽은 상태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오바마는 불가능에 도전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실현한 사람”이라며 “한국에도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1970년 한샘을 세워 국내 1위 가구 기업으로 키운 조 이사장은 재계에서 ‘운둔의 경영자’로 불려왔다. 대외활동이 거의 없었고, 언론노출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최근 언론에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울림 때문이다.

조 이사장은 2015년 한샘 보유지분 절반인 260만여주(처분 당시 종가기준 5083억원)를 태재재단에 기부하기로 밝혔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 중 300억원으로 2015년 12월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를 설립했다. 내년에는 2210억원을 출연한 ‘한국판 미네르바 스쿨’인 ‘태재디지털대학’이 개교한다. 조 이사장은 대학 설립을 위해 지난해 7월 자신의 한샘 지분(15.45%)과 특수관계인 등의 지분을 사모펀드 운용사인 ‘IMM프라이빗에쿼티(IMM PE)’에 전량 매각하는 양해각서를 서둘러 체결한 것으로 전해졌다. 매각대금은 총 1조4412억원이다.

조 이사장을 지난 8일 만나고 14일 추가로 전화통화를 했다.

조창걸 이사장은 “미·중 갈등이 아니라 미·중 협력 관계로 바꾸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며 자신이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를 설립하고 ‘태재디지털대학’을 설립하는 이유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력자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조창걸 이사장은 “미·중 갈등이 아니라 미·중 협력 관계로 바꾸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며 자신이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를 설립하고 ‘태재디지털대학’을 설립하는 이유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력자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소수의 훌륭한 리더 힘입어
미국은 다방면에서 세계 최강국
우리에겐 그런 지도자 없었다
다가올 미·중 대란 대비 시급

- 1970년부터 피땀 흘려 키운 한샘을 정리하면서 아쉬움은 없습니까.

“그것보다, 한국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6·25전쟁 같은 국가적 재난을 끊임없이 겪어왔잖아요. 또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통일을 못하고 있고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한번 잘 생각해봐요.”

- 지정학적 위치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리더가 없기 때문이에요.”

- 지혜로운 지도자가 있었다면 남북 통일은 벌써 이뤄졌을 것이란 말씀인가요.

“좋은 예가 미국이에요. 미국은 240년 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13개주에 불과했어요. 그렇게 미약했던 미국이 군사력은 물론 경제·문화·창조 다방면에서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서너 명의 훌륭한 리더의 힘이에요. 그들은 미국이 세계 미래를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기 위해선 어떤 권력 형태를 지녀야 하는가를 고민해 미국 헌법을 완성했어요. 반면 우리에게는 단 한 명의 훌륭한 지도자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일합방이나 6·25보다 더 큰 재난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 어떤 재난을 말씀하는 건가요.

“미·중 갈등. 세계 최강대국이 부딪치고 있잖아요. 지금 미국과 중국은 경제규모가 거의 비슷해요. 국방비나 연구개발비를 양국이 같은 비율로 쓸 수 있다는 얘기지요. 이들이 죽기살기로 싸우면 국방은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온전하겠느냐 이거예요. 게다가 미국, 중국,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 있어요. 만일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해야겠다고 결정하면 어디를 먼저 칠 것 같아요? 베이징과 거리상 가장 가까운 주한미군 기지일 테고 핵전쟁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 그런 위협에서 벗어날 최선의 방안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미·중 갈등이 아닌 미·중 협력 관계로 바꾸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에요. 내가 여시재를 만들고, 대학을 설립하는 이유는 이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력자를 키우기 위해서예요.”

미국 벤처사업가 벤 넬슨이 2011년 설립한 ‘미네르바 스쿨’을 벤치마킹하는 ‘태재디지털대학’은 매년 100명의 한국인 학생을 뽑고, 나머지 100명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학생으로 구성한다. 조창걸 이사장이 태재디지털대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미국 벤처사업가 벤 넬슨이 2011년 설립한 ‘미네르바 스쿨’을 벤치마킹하는 ‘태재디지털대학’은 매년 100명의 한국인 학생을 뽑고, 나머지 100명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학생으로 구성한다. 조창걸 이사장이 태재디지털대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210억원 출연 ‘태재디지털대학’
한·미·일·중·러서 학생 선발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 이해해
우리 미래와 지구 번영 준비

태재디지털대학은 미국 벤처사업가 벤 넬슨이 2011년 설립한 ‘미네르바 스쿨’을 벤치마킹한다. 미네르바 스쿨은 캠퍼스가 없는 대신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세계 7곳에 기숙사를 운영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 아르헨티나·한국·인도 등 7개국에서 몇개월씩 생활하며 3년을 보낸다. 수업은 모두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행된다. 매년 150명 신입생 모집에 각국에서 2만명 넘게 지원한다.

태재디지털대학은 올 하반기부터 매년 200명을 선발한다. 절반은 한국, 나머지 절반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에서 뽑는다. 이 5개국을 돌며 온라인 플랫폼으로 수업하고 메타버스 캠퍼스를 구축한다. 그가 이사장을, 초대 총장은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 맡는다. 김용학 전 연세대 총장,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 등이 이사로 참여한다. 지난 1월 교육부로부터 법인허가를 받았다.

- 왜 ‘한국판 미네르바 스쿨’인가요.

“지금 세상은 디지털로 인해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하지만 대학들은 강의실·강당·체육관 같은 하드웨어에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지요. 등록금은 올리면서 교육에 집중 투자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교육 방식도 교수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데 머무르고 있어요. 그런데 미네르바 스쿨은 혁명적이에요. 기숙사 외에는 어떤 시설도 없이 교육하는데,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하고 배출하면서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명문대 못지않은 성과를 내고 있어요.”

- 미네르바 스쿨의 교육 노하우와 시스템이 그대로 태재디지털대학에 이식되는 건가요.

“개교 후 첫 5년간은 그렇게 하고 5년 후에는 미네르바 스쿨이 놓쳤던 부분을 보완해 하버드, 스탠퍼드를 넘어서는 대학을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예요. 하지만 미네르바 스쿨 측이 10년간 자기네 시스템을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협상 중이에요.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어요. 미네르바 스쿨에 참여한 스티븐 코슬린 전 하버드대 사회과학대학장의 도움을 얻어 미네르바 스쿨 형식의 대학을 완성할 거니까요.”

- 선발 지역으로 한국 외에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를 선택한 이유는요.

“한반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들이니까요.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해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야 해요. 또 인류 번영에 기여하는 세계의 지도자들을 양성해야죠.”

- 학생의 절반이 학비 걱정 없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마치게 하는 것도 목표라고 하셨지요.

“제대로만 운영되면 나 같은 놈이 수없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러면 모든 학생이 전액 장학금으로 다니게 될 수도 있지요. 모든 세계적인 재단은 최초 출연자의 돈으로만 운영되지 않아요. 초기 자금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조창걸 이사장은 1970년 자본금 200만원으로 한샘을 설립해 불과 15년 만에 국내 부엌 가구 부문 1위, 30여년 만에 홈 인테리어 가구 부문 1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사진은 2020년 촬영한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샘 사옥.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창걸 이사장은 1970년 자본금 200만원으로 한샘을 설립해 불과 15년 만에 국내 부엌 가구 부문 1위, 30여년 만에 홈 인테리어 가구 부문 1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사진은 2020년 촬영한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샘 사옥. 경향신문 자료사진

1939년 평양 출생…3세 때 온가족 서울로
서울대 건축과 졸업 후 1970년 한샘 설립
낙후된 부엌공간에 ‘가구’ 개념 도입해
한국의 주거문화 선도

조 이사장은 193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서울 대광고,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몇년 후인 1970년 ‘부엌 가구 전문회사’ 한샘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200만원.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7평 규모의 작은 전시 매장과 사무실을 내고, 불광동에 군용 천막과 비닐하우스로 된 10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해 출발했다. 불과 15년 만에 한샘을 국내 부엌 가구 부문 1위, 30여년 만에 홈 인테리어 가구 부문 1위 기업으로 키웠다.

- 6·25 때 서울로 피란 온 건가요.

“해방되기 전, 제가 세 살 때 부모님이 도쿄 유학에서 돌아오시면서 조부모까지 온 가족이 서울로 왔어요.”

- 조부와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요.

“조부는 한의와 양의를 겸한 최초의 의사셨어요. 아버지는 도쿄에서 건축을 배우셨지요. 해방 후 서울시에서 건축기사로 일하셨고 6·25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양공대(현 한양대)에서 건축과 교수로 근무하셨어요.”

- 전쟁 경험이 남북 분단 상황과 미·중 갈등에 의한 위협에 더 관심을 갖는 요인이 됐을까요.

“지도자가 없는 사회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뼈저리게 경험했지요.”

- 건축가라고 하면 흔히 멋진 건축물을 설계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왜 하필 부엌 가구 전문회사를 창업했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7년간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했어요. 비싼 빌딩이나 주택을 설계했지요. 1년에 한두 채 잘사는 사람들의 고급 주택과 빌딩을 설계하는 데 내 재능이 쓰인 거예요. 그런데 한샘에서는 매년 20만가구의 부엌 가구를 만들었어요. 지금도 일본보다 한국의 부엌이 훨씬 나아요. 그만큼 수준을 레벨 업하는 데 공헌했다는 자부심이 있지요. 출발할 때 나는, 나보다 각각 500배, 200배에 달하는 자본금을 갖추고 있는 경쟁사들을 앞지를 자신이 있었어요.”

- 어디서 기인한 자신감인가요.

“부엌은 물과 불, 가스와 전기의 배관 및 배선이 한데 모여 있어 위험한 공간이에요. 음식물이 있어 썩거나 더러워질 수 있는 환경이지만 위생적이어야 한다는 욕구가 있는 곳이지요. 개수대와 조리대, 가열대, 배선대 등을 질서 있게 배치하고 주부들의 동선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해요. 그걸 모르는 경쟁사들은 스테인리스 스틸 상판만 생산했어요. 유일하게 한샘만 캐비닛까지 제작해 주부들이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구조를 제공했지요.”

- 한샘을 경영하면서 인재 육성에 특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아요. 공동의 목표를 갖게 하고, 능력 있는 인재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철저히 했다고요.

“그건 모든 사회의 원리예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이룩한 것도 그 원리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인데, 통일됐을 때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더 이상 나눠줄 땅이 없었어요. 놔두면 반란을 일으킬 게 뻔했지요. 그래서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하면 그 땅을 나눠주겠다고 동기부여를 한 거예요. 그러니 이놈들이 죽기살기로 싸운 거지요. 역사를 제대로 읽는 지도자라면 도요토미가 틀림없이 한반도를 침략할 것을 알 텐데, 선조는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는 바람에 조선땅이 쑥대밭이 된 거예요.”

조창걸 회장은 1994년 한샘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한샘 실무자들과의 회의는 계속해왔다. 그는 “나는 수없이 세웠다가 지웠다가 다시 세우길 반복한 끝에 가장 좋은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고, 집행은 직원들이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민 기자

조창걸 회장은 1994년 한샘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한샘 실무자들과의 회의는 계속해왔다. 그는 “나는 수없이 세웠다가 지웠다가 다시 세우길 반복한 끝에 가장 좋은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고, 집행은 직원들이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민 기자

자기 삶에 대해
필요 이상의 욕심을 갖는 것은
불행의 씨앗
우리 가족들은 과욕 없어
경영권이나 재산 대물림 안해

그는 1994년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슬하에 1남3녀를 뒀지만, 아들 원찬씨는 2002년 사망했다. 장녀 은영씨는 미국 의학대학 교수이고 차녀 은희씨와 삼녀 은진씨는 전업주부다.

- 왜 한창 일할 나이인 55세에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습니까.

“일이라는 것은 계획을 통해 가장 좋은 방안을 찾고 그것을 집행하는 거예요. 계획을 잘 세우는 게 일을 성공시키는 제일 중요한 요소지요. 나는 수없이 세웠다가 지웠다가 다시 세우길 반복한 끝에 가장 좋은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고, 집행은 직원들이 하는 거예요(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재단 사무실에서 오전 5시에 한샘 실무자들과 회의를 해왔다).”

- 태재재단과 태재홀딩스 부설 연구소에서 스마트홈과 스마트시티를 설계하고 있다고요.

“서울대와 카이스트에 연구용역을 줬어요. 디지털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도시와 주택에 있어요.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집 안에서 먹고 마시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추적할 수 있지요. 이를 통해 현재 건강상태와 몇년 후 어떤 질병에 걸릴지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어요. 또 아이가 태어나면 집 자체가 아이의 행동 분석을 통해 재능을 확인하고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어요. 스마트시티는 이것을 확장해 시민의 질병과 사고를 예방하도록 도시를 설계하는 거지요.”

- 경영권 승계도, 재산의 대물림도 없는데,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자기 삶에 대해 필요 이상의 욕심을 갖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에요. 우리 가족들은 과욕이 없어요.”

서울 종로구 원서동 태재재단 5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통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서면 창덕궁이 바로 내려다 보인다. 조창걸 이사장이 창덕궁을 가리키며 창덕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서울 종로구 원서동 태재재단 5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통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서면 창덕궁이 바로 내려다 보인다. 조창걸 이사장이 창덕궁을 가리키며 창덕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오전 2시에 일어나 3시에 아침밥
회사 설립 후 계속 새벽형 인간
오전 9시 퇴근 후 독서로 하루 보내
건강? 단전호흡 한 지 40년

조 이사장은 재계에서 손꼽히는 ‘새벽형 인간’이다. 저녁 8시에 잠들어 새벽 2시에 일어난다. 새벽 4시40분이면 서울 원서동 태재재단에 출근한다. 업무를 보고 남들이 출근하는 오전 9시쯤 퇴근한다. 이후 근처에 위치한 별채 겸 서재 ‘녹원’에서 독서로 하루를 보낸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 언제부터 새벽형 인간으로 살았습니까.

“회사를 시작하면서 계속된 습관이에요. 돈이 없으니까 남보다 몇배 열심히 일했거든. 초창기 한 5~6년간은 집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 들어갔어요. 회사에서 먹고 자고 했지요.”

- 아침식사는 몇시에 하나요.

“새벽 3시.”

- 그 시간에 부인이 차려주나요. 부인 입장에서는 싫을 것 같은데요.

“전날 미리 차려놓은 거 내가 챙겨 먹어요(웃음).”

- 과거에는 취미로 복싱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운동은 안 하십니까.

“단전호흡을 한 지 40년 됐어요. 녹원에서 도복 입고 매일 1시간 정도 해요.”

그는 5분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정치·경제·역사·문화부터 지구환경·기후변화까지 관심 분야 스펙트럼도 넓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야기는 시종 막힘이 없이 유려한 데다 깊이가 느껴졌다. 지도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는 그에게 물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그는 말했다.

“미래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지도자가 참된 지도자예요. 앞으로 닥칠 재난을 기회로 만드는 것을 공동목표로 삼고 그 목표 성취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아내 책임져야 하지요. 그것은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스스로 비전을 만들고, 그 꿈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화해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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