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일제고사는 학교를 어떻게 망가뜨렸나···기초학력 올린다며 ‘시험’ 강조, MB정부와 판박이

남지원 기자
2011년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에 일제고사 대비 문제집이 쌓여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에 일제고사 대비 문제집이 쌓여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초학력 보장 종합계획’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기초학력 제로 플랜’과 판박이 수준으로 같다. 당시에도 정부는 학습부진 학생을 줄여야 한다며 이른바 ‘일제고사’라고 불리는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전수평가를 했다.

일제고사 실시 3년만에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는 학교별 경쟁 유도와 가혹행위에 가까운 벼락치기 문제 풀이 수업으로 낸 반짝 성과일 뿐 실제로 학생들의 학력이 올라간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고사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고 기초학력을 끌어올리려면 과거와 같은 국가 차원의 시험 일변도 정책이 아닌 학생별 맞춤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교육부는 지난 11일 발표한 ‘제1차 기초학력 종합계획(2023~2027)’에서 “학교별 객관적이고 일관된 기준에 따른 (기초학력) 진단이 부족하다”며 맞춤형 학업성취도 자율평가 대상 학년을 2024년까지 초3~고2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던 2008년 3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가 첫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공개한 ‘기초학력미달 제로 플랜’과 상당히 유사하다. 당시 교과부 역시 기초학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평가체제를 선진화해야 한다며 ‘시험’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는 3%만 표집해 실시했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를 초6·중3·고1을 대상으로 전수 실시(일제고사)하게 됐다.

교과부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시도교육청·학교별로 성적을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을 썼다. 2010년부터는 학업성취도평가 결과 보통학력 이상 비율이, 2011년부터는 전년 대비 향상도가 학교알리미에 공시됐다.

기초학력미달 비율과 전년 대비 향상도 등의 지표는 시도교육청 평가와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교부기준에 반영됐다. 향상도 우수 학교에는 인센티브가, 미흡한 학교에는 불이익이 돌아갔다. 교사 개인도 학생 성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았다. 성적이 우수한 학교의 학교장과 교사는 승진 가산점을 받았고 성과급에도 일제고사 성적에 따른 지표가 반영됐다.

14년 전 일제고사는 학교를 어떻게 망가뜨렸나···기초학력 올린다며 ‘시험’ 강조, MB정부와 판박이

일제고사 성적이 학교를 서열화하고, 교사와 학교, 교육청에 돌아가는 경제적 보상을 결정하게 되면서 일선 학교들은 학습부진 학생들의 학력을 끌어올린다는 본래 목적보다 ‘성적 낮은 학생 없애기’에 집중했다. 교육청이 성적을 조작하거나 교사가 부정행위를 유도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전북 임실교육청이 기초학력미달비율을 0%로 조작했다가 적발됐다. 2010년 충북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교감과 교사들이 시험 감독을 하면서 틀린 답을 한 학생에게 정답을 유도해준 일이 알려졌다. 일제고사 성적이 크게 올라 ‘창의경영학교’로 선정된 충남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담임교사가 성적에 따라 학생들에게 초신·귀족·평민·천민·노예 등급을 매기고 ‘노예 등급’ 학생을 저학년 교실로 보내 망신을 줬다. 같은 학교에서 일제고사 대비 모의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초등학생의 발바닥을 90대 때린 교사도 나왔다. 예체능 시간에 일제고사 시험 과목 문제풀이를 하거나 학생들에게 0교시·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도 많았다. 운동부·특수학급·다문화가정 등 성적이 낮은 학생은 아예 응시하지 못하게 한 학교도 있었다.

기초학력미달비율은 2008년 7.2%에서 2010년 3.7%로 줄었다. 하지만 당시 학교 현장에서는 시험 조작과 문제풀이 교육으로 ‘시험 점수’만 올랐지 실제 학생들의 학업 수준이 오른 것은 아니라는 반응이 많았다. 2012년 학업성취도평가에서 성적이 많이 오른 고교 19곳을 선정해 2012년과 2014년 수능시험 백분위 평균을 비교해보니 13개교는 국어 성적이, 14개교는 수학·영어 성적이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는 조사결과도 있었다.

교육부는 지난 11일 학업성취도 자율평가는 학급·학교 단위로 자율적으로 응시하는 시험인 만큼 전수평가가 아니며 일제고사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개인별 시험거부가 허용됐던 이명박 정부 때도 교육당국과 학교가 나서서 시험 응시를 사실상 강요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고사 미응시자를 무단결석 처리하거나 내신에 일제고사 성적을 반영하기도 했다. 일제고사일 체험학습을 허용한 전교조 교사들은 무더기로 파면·해임됐다.

이미 부산과 제주교육청이 관내 학교에 학업성취도 자율평가 전수 응시를 요구하는 등 학업성취도 자율평가가 사실상의 전수평가화될 조짐이 나타났다. 교육부는 자율평가 성적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에게만 제공하고 학교별·교육청별로 공개해 활용하지는 않겠다고 설명하지만 전수평가화될 경우 교육청과 학교들이 성적을 자체 취합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자는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교육과학문화수석과 교과부 차관·장관을 역임하며 일제고사 등 ‘MB표 교육정책’을 주도했다. 송경원 정의당 정책위원은 “이 후보자가 가진 철학과 과거 밀어붙이기식 업무처리 방식을 보면 평가로 만든 점수를 학교별로 비교할 수 있도록 공개하게 할 가능성도 있다”며 “기초학력을 보장할 방안은 지필고사, 관찰, 면담 등 다양한데 정부가 한 방안을 강제하는 것은 닦달교육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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