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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도서들에 ‘금서’ 낙인 땅땅···학교 도서관에서 없애라고요?

김나연 기자
도서관에 책들이 놓여 있다. pixabay

도서관에 책들이 놓여 있다. pixabay

“학교 친구들이 아직도 내게 묻곤 해. 스파이더맨 가방은 남자애들 건데. 왜 여자인 내가 들고 다니냐고 말이야.”

스파이더맨을 유난히 좋아하는 소녀 클로에는 초등학교 입학 첫날 스파이더맨 가방을 메고 등교했다. 어느 날은 배트맨 티셔츠를 입었다. 친구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애 같다”며 놀렸다. 클로에의 부모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놀고, 우리가 입고 싶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알려준다. 클로에가 “나는 사랑, 행복, 평온이 있는 삶을 원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책은 끝난다.

-도서 <스파이더맨 가방을 멘 아이>

“누가 봐도 한 눈에 가족임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2011년 독일 아동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은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알려준다.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뿐 아니라 친구, 반려동물도 ‘제2의 가족’으로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가족 간 갈등과 관계 회복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가족 내에서도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도서 <세상의 모든 가족>

최근 일부 보수단체와 학부모 단체로부터 ‘유해도서’로 분류된 책의 내용 중 일부다. 경기도교육청에는 해당 도서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없애달라는 민원도 접수됐다. “성인 영역에 속하는 내용을 품고 있는 도서들”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지난해 이들 보수단체와 학부모단체가 문제를 제기한 도서 목록만 140권이 넘는다. 경기도교육청은 관내 학교에 관련 도서에 대한 조치 사항을 제출하고 요구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도서 검열이자 학교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우려가 나온다.

경기교육청이 관내 학교에 보낸 공문 일부.

경기교육청이 관내 학교에 보낸 공문 일부.

30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29일 관내 교육지원청으로부터 일선 학교의 ‘성교육 도서 처리 결과 도서목록’을 수합했다.

지난해부터 경기 지역에서는 일부 보수단체와 학부모단체로부터 문제가 되는 성교육 도서를 폐기해야 한다는 민원이 빗발쳤다.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11월 관내 초등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 교육목적에 적합하도록 조치하라”는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냈다. 지난달에는 ‘성교육 도서들의 처리 결과’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지난 18일 서울시내 학교로 전송된 유해논란도서 처리 협조요청 업무메일.

지난 18일 서울시내 학교로 전송된 유해논란도서 처리 협조요청 업무메일.

다른 지자체와 시도교육청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기자가 입수한 서울시내 학교 업무메일을 보면, 강남교육지원청은 해당 학교에 “유해논란도서 4종에 대한 조치 사항을 작성해 업무메일로 답장하라”고 했다. 이어 “심의에 시간이 오래 걸리니 비치 중인 도서관에서는 검색 불가로 처리해 검색, 대출이 다 불가능하도록 처리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앞서 일부 서울시의원들은 학교 도서관에 성 관련 유해도서들이 비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26일 시의회 교육위원회에서 열린 시교육청 업무보고에서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김혜영 국민의힘 시의원이 유해도서 조치 상황에 대해 묻자 “3월 개학 후 학교도서관운영위를 개최해 빠르게 조치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거제시도 최근 공공도서관의 성 관련 도서 80권을 간행물윤리위원회와 청소년보호위원회에 유해도서 심의를 요청했다. 지난해 충남 지역 공공도서관에서도 일부 도서가 열람 제한 조치를 당했다.

일부 성교육 도서가 유해도서라고 주장하는 측은 ‘선정성’과 ‘동성애 조장’이 문제가 된다고 본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보건학문&인권연구소’가 일선 초등학교에 보낸 문서를 보면, 이 단체는 ‘동성애’ ‘가정붕괴의 원인이 되고 있음’ 등을 유해도서 지정 사유로 밝혔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해당 도서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배제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덕주 한국학교도서관협의회 대표는 “서울시의회에서 문제 제기했던 책들을 검토하기 위해 (협의회가) 다양한 위원들을 위촉해서 검토했으나 금지할 만한 책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지도가 같이 필요한 정도의 책이라는 정도의 의견만 있었다”며 “도서관에 대한 간섭”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경기도의회 교육행정위원회 소속 김미리 의원이 ‘학교도서관 내 도서 선정 기준 및 내용 관련 정담회’를 열어 유해논란도서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결과 “용어해설이 구체적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가르친다” “당당한 나다움을 알 수 있다” 등의 의견들이 모였다.

김 의원은 “이미 출간되기까지 검수를 받은 책들이고, 일부 단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그림들도 책을 보면 문제가 없는 내용들인데 (교육청이) 뜬금없이 폐기 목록을 왜 받나”라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지난해 10월 경기지역 초등학교에 보낸 청소년 유해도서 분리제거 재협조요청 문서. 이덕주 한국학교도서관협의회 회장 제공

시민단체가 지난해 10월 경기지역 초등학교에 보낸 청소년 유해도서 분리제거 재협조요청 문서. 이덕주 한국학교도서관협의회 회장 제공

일선 교육청은 논란 도서들의 폐기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학교에서 (해당 도서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하는 것”이라며 “교육청에 폐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도 “점검 차원이고, 문제 제기된 4권에 대해서는 현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해 안내가 간 것 같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성평등 도서 검열에 대한 압박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9일 고양여성민우회 등 305개 시민사회단체 성명을 내고 “성교육 도서 폐기 목록을 보고하라는 것은 성교육 도서 검열”이라며 도서 목록 제출 통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신웅식 경기 지역 교사는 “학교 안에서 여러 가치가 존중돼야 하는데 학생들의 도서가 폐기될 때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며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누군가의 말에 따라 교육청이 방관한 것이고, 특정 생각이나 사상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기 지역 사서교사도 “학교 구성원들과 논의한 책들에 대해 외부에서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게 황당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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