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 주 57.4시간, 남성의 2배, 육아 이후엔 ‘입시’ 이유 경력단절
양립 위해 선택하는 ‘유연 일자리’ 결국 차별적 노동구조로 이어져
30대 ‘비출산 결심’ 늘어난 이유
대기업 차장급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 김모씨(44)는 내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을 생각하면 고민이 많다. 당장 겨울방학에 아이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일하는 엄마 탓에 필요한 교육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미안하다. 직장일이라고 만족스럽게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씨는 “직장에서도 직급이 높아질수록 책임 있는 역할을 요구받는데, 일에만 전념하기엔 교육이나 육아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면서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집에서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고 했다.
기혼여성의 고용률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이 ‘일과 가정’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 결과가 최근 잇따라 발표됐다. 명시적으로는 남녀 사이의 제도적 차별이 사라졌지만, 은연중에 돌봄이나 교육이 여성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남성에게는 ‘되면 좋은 것’의 차원이라면 여성에게는 ‘절실한 문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경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노동 공급 문제뿐 아니라, 심각한 저출생 문제도 해결이 난망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플랫]노벨 경제학상, 뿌리깊은 ‘성별 임금격차’ 원인 분석한 클로디아 골딘
높아지는 여성 고용률
아이가 있는 여성이 일자리를 유지하는 비중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8세 미만 자녀와 함께 사는 15~54세 기혼여성의 고용률은 60.0%로 전년 대비 2.2%포인트 상승해 2016년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자녀 수별 고용률은 1명 61.2%, 2명 59.3%, 3명 이상 56.6%로 자녀 수가 많을수록 고용률이 낮아졌다.
한국은행 고용분석팀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노동시장이 회복되는 상황에서 여성 중심으로 고용이 증가하는 ‘시커버리(she-covery)’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1월과 엔데믹을 선언한 뒤인 지난 4월을 비교했을 때 남성 고용률이 0.3%포인트 오르는 데 그친 반면, 여성은 1.8%포인트 상승했다. 한은은 ‘여성고용 회복세 평가’ 보고서를 통해 “팬데믹 초기에 보육시설이 폐쇄되면서 육아부담 가능성이 높은 기혼 여성의 노동 공급이 크게 축소되었다가, 이후 폐쇄가 완화되면서 기혼여성의 고용이 미혼보다 빠르게 회복됐다”고 했다.
일·가사·교육은 모두 엄마의 몫
여전히 ‘워킹대디’에 비해 ‘워킹맘’이 커리어를 유지하기는 훨씬 어려운 게 현실이다. 가사분담이나 육아·교육에 대한 책임에서 여성이 더 큰 역할을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로디아 골딘 교수는 오랜 시간 노동을 요구하고 항상 비상대기 상태로 상시 응대해야 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와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적어 시간 활용이 쉬운 ‘유연한 일자리’로 일자리 특성을 구분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남성이 탐욕스러운 일자리를 선택하고 여성이 유연한 일자리를 선택한다”면서 “이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소득 격차로도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플랫] ‘탐욕스러운 일자리’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
지난해 통계청 조사 결과 전 직급에서 남성 근로자는 돌봄과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 아내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과장급 남성 근로자는 가정일에 주당 30.2시간을 쓰고 여성 배우자는 2배에 가까운 57.4시간을 집안일과 돌봄에 썼다. 반면 과장급 여성 근로자는 본인이 41.4시간을 돌봄과 집안일에 쓰고, 남성 배우자는 28.8시간을 쓰는 데 그쳐 남편보다 더 많은 집안일을 소화했다. 강소현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돌봄 및 집안일이 남녀 간 균등하게 분담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임원급까지 경력을 쌓아 업무적 성공을 거둔 여성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강 연구위원은 “출산과 돌봄으로 인해 포기하는 대가가 커질수록 여성의 출산 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저출생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또 여성이 유아기의 한 고비를 넘어도 교육이라는 새로운 벽에 부딪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혼·출산·육아 등을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은 줄었지만 자녀교육을 위해 직장을 떠나는 경우는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경력단절여성은 134만9000명으로 전년 대비 4만8000명 줄었다. 15~54세 기혼여성 중 경력단절여성 비율은 17.0%로 0.2%포인트 하락했다. 경력단절 이유로는 여전히 육아(42.0%)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지난해와 비교해 육아(-3만명), 결혼(-1만4000명), 임신·출산(-7000명), 가족돌봄(-6000명) 등으로 인한 경력단절 규모는 줄어든 반면 자녀교육은 지난해보다 1만명 늘었다.
차별 구조가 낳은 저출생
일과 가정의 양립이 쉽지 않은 문제가 되면서 아이를 낳지 않고 커리어를 유지하는 여성이 30대를 중심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심각한 저출생 문제에 남녀 사이의 차별적 노동구조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김지연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1983~1987년생 여성이 30~34세였던 시기인 2017년과 1988~1992년생이 같은 나이대에 도달한 2022년을 비교한 결과, 이 연령대의 경제활동참가율은 66.2%에서 75.0%로 5년 만에 8.8%포인트 상승했다. ‘자녀 있는 여성의 비중 감소’가 5.3%포인트를 차지해 기여도가 컸다. 아이를 낳지 않고 일을 선택했기 때문에 3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한은 경제연구원은 초저출생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가 2050년부터 역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황인도 한은 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실질적인 일·가정 양립 환경을 조성하고, 변화하는 가치관에 맞추어 아이 중심 지원체계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특히 남성 및 중소기업 근로자의 육아휴직 사용률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 이윤주 기자 runyj@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