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이 되던 해인 4년 전, A씨는 자신이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A님의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것 같다”는 제보를 받고 인터넷 링크를 클릭해 들어갔더니 자신의 사진뿐 아니라 이름, 나이, 거주지와 같은 개인정보와 각종 성희롱적 발언이 뒤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가해자 중 한 명의 신원을 특정해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잡지 못한 가해자가 더 많다”면서 “수사에 진전이 없어 종결한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A씨는 이른바 ‘지인능욕’ 피해를 공론화하기 위해 언론·경찰을 찾아다니며 고군분투한 피해 당사자다. 지난 5일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장혜영 정의당 전 의원이 연 ‘딥페이크 성폭력 박멸을 위한 긴급 토론회’에 그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그는 딥페이크 성착취물 범죄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범죄는 ‘그저’ 디지털 성범죄가 아니라 “가해자가 지인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중범죄라고 했다. 대학생이자 ‘추적단 불꽃’ 활동가 시절 A씨와 함께 이 문제를 파헤치고 공론화했던 박 전 비대위원장이 그의 글을 대독했다.
두 여성 원외 정치인이 이날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연 긴급토론회의 제목은 ‘정치, 이번에는 제대로 해결하자!’였다. 이들은 반복되는 디지털 성착취물 문제의 뿌리를 뽑기 위해선 ‘정치적 일관성’을 바탕으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전 의원은 “뿌리 깊게 우리 사회에 존재한 성차별과 성폭력이 기술을 만나 새로워 보이는 형태로 발현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며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하는 입장을 유지하는 한 대책이 유명무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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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비대위원장은 2019년 ‘n번방’ 사태에서 달라진 것은 “범죄가 더욱 쉬워졌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전엔 1 대 1로 사진 합성을 의뢰하는 식이었다면 이젠 1분도 안 걸려 사진을 합성하는 ‘제작 AI봇’과 제작자가 등장해 ‘다 대 다’로 성착취물이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비대위원장은 자율규제 강화만으론 5년 전 텔레그램과 지난해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로부터 파생된 성범죄를 막지 못한 과거를 답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텔레그램 접속 차단 등 강경 대응에 나선 브라질이나 정부 주도의 접촉 노력으로 텔레그램의 협조를 끌어낸 독일 사례처럼 정부가 주체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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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준비된 토론회였지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청중이 모였다. 주최 측에 따르면 토론회 현장에 83명이 참석하고 유튜브 생중계로 200여명이 시청했다. 토론자로 참가한 청년, 문화예술계 종사자(배우), 양육자, 교사, 여성학 전문가 등은 자신의 위치에서 정치권에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촉구했다.
교사와 양육자는 ‘포괄적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수진 초등성평등교사모임 ‘아웃박스’ 교사는 “교실에서 ‘여성 혐오’가 심각하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보도되던 2016년부터 성평등 얘기를 해왔다”며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학생들이 올해 21세가 될 만큼의 기간”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의 교실이 5~10년 후 우리 사회의 모습이 된다”라며 “지금부터라도 딥페이크 성착취물 문제가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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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대책을 내놓기 전에 이 문제를 충분히 진단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n번방 사태’가 불거졌을 때, 무너진 사회의 젠더·윤리관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라고 지적했던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실패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정치가 대책을 마련하도록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토론자들의 발언 뒤 청중들의 발언도 쇄도했다. 인천에서 온 고등학교 남학생은 “성범죄 예방교육이 ‘가해 하면 안 된다’ ‘피해 당한 게 죄가 아니며 곧바로 신고하라’는 내용인데, 잘 모르겠다”며 “지금의 교육으로는 주변에 피해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어렵다고 느낀다”고 했다. 한 여성 청소년은 “교실에서 ‘페미니스트는 정신병’이라는 말을 하는 남학생들이 많다”며 “청소년이 온라인상 혐오발언에 쉽게 노출되는 현실을 함께 고민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청중의 성원에 박 전 위원장과 장 전 의원은 “이 자리가 끝이 되어선 안 되겠다”고 했다. 장 전 의원은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대응을 뒤튼 정치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일관된 대응을 촉구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들이 함께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 전지현 기자 jhyu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