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간병사회(1)

“열다섯 이후 아버지 13년째 돌봐…지원 어떻게 받는지 지금도 몰라”

이창준 기자 김향미 기자

돌봄자들의 목소리

13년 전부터 뇌출혈·뇌경색으로 쓰러진 부친을 돌보고 있는 영 케어러(청년 돌봄자) 김율씨가 지난 15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자신의 음악 작업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13년 전부터 뇌출혈·뇌경색으로 쓰러진 부친을 돌보고 있는 영 케어러(청년 돌봄자) 김율씨가 지난 15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자신의 음악 작업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열다섯,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아버지의 ‘보호자’가 됐다. 정신질환을 앓는 성인을 돌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몰랐다. 주변 어른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집의 전기와 가스가 끊기고, 아버지가 딸에게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며 주먹을 휘두르는 동안 사회는 그저 지켜만 봤다.

‘영 케어러’ 김율씨(28)는 13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의 보호자다. 이젠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한다. 아버지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의 힘도 길렀다. 하지만 그는 더 어렵다고 했다.

“저는 보호자가 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치료를 거부하는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법도 배운 적이 없어요. 입원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지원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사회·경제적으로 미숙한데 혼자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게 두려워”

■“저는 ‘영 케어러’입니다”

디스크 수술 후 몸이 불편한 모친을 돌보고 있는 영 케어러(청년 돌봄자) A씨가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디스크 수술 후 몸이 불편한 모친을 돌보고 있는 영 케어러(청년 돌봄자) A씨가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학생·사회초년생인 ‘영 케어러들’
병원비와 생계비 등 감당 버겁고
교육 결손으로 불안정한 직업 전전

영 케어러(Young Carer)는 질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돌보는 청년, 즉 ‘청년 돌봄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혼 후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져서,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해서, 단둘이 함께 살던 할머니가 치매를 앓게 돼서 청년들은 예고치 않게 영 케어러가 된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이혼했다. 김씨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뇌출혈로 쓰러졌고, 2018년 다시 뇌경색이 발생해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가 됐다. 뇌경색으로 입원한 병원은 그가 오래전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김씨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행동이 돌봄이 필요한 질병 때문임을 그때서야 알게 됐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혼자 살던 그는 아버지가 정신질환자라는 걸 알게 된 후 다시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를 돌볼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버지가 사회적 약자라는 걸 그때 알게 됐다”며 “돌보겠다고 결심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지금 나는 아버지보다 강한데, 강자가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A씨(39)는 19세이던 2001년 이혼한 어머니가 허리 수술로 장애 판정을 받으면서 어머니의 보호자가 됐다. 친구들은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하던 20대에 A씨는 일을 하며 월세와 전기료를 냈다. 보호자 신분으로 있던 20년 동안 어머니는 허리 수술만 여섯 번을 했다. A씨도 평소 허리디스크를 앓는 등 몸이 성치 않았지만 어머니의 수술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동차 정비, 아이스크림 운송 등 힘쓰는 일을 계속했다.

여유도 없고 몸도 좋지 않아 A씨는 5년 전 결혼을 생각하던 연인에게 이별을 고했다. A씨는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진 않지만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이라도 부족함 없이 모시고 싶은 마음이다. A씨는 “어린 시절 사고도 많이 쳤는데 그때마다 부모님이 울타리가 돼줬다. 이젠 내가 울타리 역할을 해드려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영 케어러에 대한 실태조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국회에서 영 케어러 실태조사 및 지원을 명문화하기 위한 ‘청소년복지 지원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국내 영 케어러로 추정할 수 있는 만 25세 미만 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2020년 기준 3만1921명, 긴급복지지원 대상자는 559명이다. 최근 3년간 위기가정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만 18세 미만 청소년의 부모·조부모 부양 현황을 보면 2018년 14명, 2019년 10명, 2020년 16명, 올해는 7월까지 16명이다.

■‘보호자’라는 이름의 무게

영 케어러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금전적 어려움이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사회초년생이나 학생일 때 돌봄 부담을 떠안게 된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가장이 된 청년들은 당장 직업을 얻고 간병에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급여 수준이 낮고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B씨(40)는 27세이던 200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애인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영 케어러가 됐다. 비정규직인 콜센터 노동자로 첫 직장을 얻은 그는 어머니가 수급자 신분이 된 2013년까지 매달 100만원에 달하는 의료비를 부담해야 했다. B씨는 의료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기계약 형태로 콜센터 노동자와 일반 사무원을 채용하는 직장을 찾아다니며 1~2년마다 취업과 실업을 반복했다.

보호자라는 이름의 무게는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본격적으로 펼쳐보이기도 전에 이를 짓눌러 버린다. 특히 많은 영 케어러들은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업과 취미 등 자기계발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이는 이들이 열악한 조건의 직업군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B씨는 “늦더라도 대학에 꼭 가고 싶었는데 일을 쉬면서 공부할 수 없어 엄두를 못 내고 있다”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콜센터 업무라 정말 원하는 일을 하기 전까지만 이 일을 하자고 생각했는데 언제까지 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씨는 “영 케어러의 문제는 교육과 직결되는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크다”며 “10대와 20대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30대에 자리 잡지 못하면 인생은 더 이상 반전의 기회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립된 보호자들

조건 따지는 복지에 사각지대 방치
지속된 스트레스 등으로 질환 다수
“내가 아프면 가족은 누가 돌보나”
가장 걱정은 유일 보호자인 내 건강

여느 ‘독박 간병자’들과 마찬가지로 영 케어러들도 자신들을 위한 제도는커녕 기존 복지제도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김씨는 고교 시절 집에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나 기초수급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당시만 해도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아버지가 “돈을 벌 수 있다”고 주장하며 수급자 등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설득하려는 공무원은 없었다. 당시 김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은 주민센터에서 준 결식아동 쿠폰이 전부였다.

A씨는 부양의무자인 자신과 어머니가 함께 산다는 이유로 20년 동안 기초수급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교통사고를 당해 2년 넘게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긴급의료비를 신청했으나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하는 동안 생계유지를 위해 소액의 수고비를 받고 지인의 ‘고가 게임 아이템’을 대신 구매해줬는데, 이 과정에서 아이템 구매비 5000만원이 A씨의 통장에 하루가량 입금됐다는 이유에서였다.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A씨는 대부업체를 찾았다. 그는 거듭된 수술비와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포함해 4000만원가량 빚을 졌다.

영 케어러들은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고립돼 있다고 했다. 돌봄 과정에서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논의할 제도적 창구나 사회적 소통 대상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씨는 “아버지에 대한 사안은 모두 나 혼자 판단하고 책임져야 한다”며 “주변 또래든 어른이든 그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조언을 구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자신의 건강이다. 유일한 보호자인 자신이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리면 더 이상 가족을 돌볼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지속된 스트레스와 일하다 발생한 사고로 크고 작은 질환을 앓고 있다. 김씨는 3개월 전 갑상샘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은 잘 마쳤지만 ‘내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아이스크림 운송을 하던 A씨는 허리가 나빠져 김을 운송하는 일을 새로 찾았지만, 운송 중 발생한 교통사고로 허리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는 2년 반을 쉬고도 더 이상 김 박스조차 들지 못해 일반 영업직으로 직장을 옮겼다.

20대부터 어머니를 돌보던 B씨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됐다. 그는 나이 드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가장 무서운 건 저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거예요. 엄마가 나이 드는 것만큼 저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으니까요. 80대 어머니와 60대 자녀가 서로 도움받으며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요.”


Today`s HOT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솔로몬제도 총선 실시 2024 파리 올림픽 D-100
호주 흉기 난동 희생자 추모하는 꽃다발 케냐 의료 종사자들의 임금체불 시위
폭우 내린 파키스탄 페샤와르 장학금 요구 시위하는 파라과이 학생들
형사재판 출석한 트럼프 파리 올림픽 성화 채화 리허설 APC 주변에 모인 이스라엘 군인들 400여년 역사 옛 덴마크 증권거래소 화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