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락으로 떨어져야 작동하는 국가복지

박은하 기자

세 모녀 안타까운 선택 전까지 정부·사회로부터 도움 못 받아

기초수급 신청했어도 ‘불투명’… 빈소·조문 없이 장례식 치러

생활고를 겪다 집주인에게 ‘미안하다’는 쪽지와 밀린 집세 등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경향신문 2월28일자 10면 보도)의 장례식도 쓸쓸했다. 세 모녀의 발인이 28일 서울추모공원에서 치러졌다. 숨진 박모씨(61)의 남동생은 빈소 없이 조문 절차도 생략한 채 장례를 치렀다. 남동생은 “도움을 주려 해도 누나가 괜찮다며 사양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면서 눈물을 훔쳤다. 세 모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이는 친지 등 10여명이 전부였다.

이날 그들이 살던 서울 송파구 단독주택 반지하방에서는 짐 정리가 이뤄졌다. 이들이 살던 집은 중산층 주거지였다. 그릇과 옷가지 등 가재도구는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화장품도 주머니에 하나씩 담아 서랍에 가지런히 보관한 상태였다.

가전이라고는 세탁기와 TV, 라디오, 전기밥솥, 컴퓨터 2대가 전부였다. 인부 박모씨(50)는 “가전제품들은 너무 오래돼 모두 버려야 하는 것들”이라고 전했다. 만화가를 꿈꾼 박씨의 딸 김모씨(32)의 습작노트 수십권 중에는 그가 직접 참여한 동인지도 보였다. 방은 몇 시간 만에 뜯어진 테이프 흔적만 남고 텅 비었다.

세 모녀가 자살한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반지하 방. 28일 찾은 이 집 텔레비전 위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찍은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 박은하 기자

세 모녀가 자살한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반지하 방. 28일 찾은 이 집 텔레비전 위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찍은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 박은하 기자

집주인 임모씨(73)는 “조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족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집세나 공과금이 밀린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모녀들은 모두가 꼼꼼한 성격이었다. 박씨는 달걀 몇 개, 감자 몇 알까지 꼼꼼하게 정리한 가계부를, 당뇨병이 심한 큰딸(35)은 자신의 혈당 수치를 적은 것을, 작은딸은 도움이 되는 만화작법을 꼼꼼하게 기록한 수첩을 남겼다.

이들 가족의 가난은 2003년 박씨의 남편이 방광암으로 숨진 뒤부터 시작됐다. 2005년 이사온 가족은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생계는 박씨의 식당일로 해결했다.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신청한 적도 없다. 송파구 관계자는 “박씨의 나이가 60대이고, 젊은 자녀들이 있다는 점에서 설령 신청했더라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복지사 박종규씨는 “이들 가족이 몰라서 수급 신청을 못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복지혜택은 노인이나 장애인 등만 받는 것이며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문화가 있다”면서 “삐뚤어진 문화도 이런 상황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질 희망이 없다는 것이 빈곤층의 가장 큰 절망”이라며 “한국 사회는 아무것도 없이 나락에 빠져야만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지 사전에 빈곤을 예방하는 보편복지는 설계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복지정책이 도덕적 해이나 근로능력을 강조하며 국민에게 가난의 책임을 돌리는 방식으로 간다면 이런 사건은 또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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