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보관소, ‘밀양 성폭행 사건’ 영상 삭제 하루 만에 재공개
언론의 받아쓰기식 보도가 대중의 사적 제재 관심 증폭시켜
전문가 “사실 확인·검증이라는 ‘언론의 책무’ 잊지 말아야”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 가해자 신상을 폭로하며 주목받은 유튜버가 영상을 모두 삭제했다가 하루 만에 새로운 관련 영상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유튜버들까지 신상 폭로나 사건 조명에 가세하는 한편 기성 언론이 이러한 유튜버들의 폭로 행보를 실시간으로 중계해 “사이버 렉카(온라인의 부정적 이슈에 관한 영상을 제작해 이익을 챙기는 사람)가 불 지핀 논란에 언론이 기름을 끼얹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는 지난 7일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했다는 비판을 받자 관련 영상을 모두 삭제했다. 그러나 하루 만인 8일 다시 신상공개 영상을 연달아 올리기 시작했다. 이어 또 다른 유튜버도 폭로에 가담하듯 피해자와의 통화라고 주장하며 녹취록과 판결문을 공개했다. 이런 유튜버들의 폭로는 실제 피해자가 동의했는지, 사실관계가 맞는지는 검증되지 않은 채 “○○○ 유튜버, 녹취록 공개” “밀양 성폭행 가해자 1명 ○○○ 근무” 등의 제목으로 기성 언론에서 다뤄졌다.
언론의 받아쓰기식 보도행태는 유튜버의 사적제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콘텐츠화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9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단순히 유튜브에 공개됐다고 해서 파장이 이토록 커지진 않는데 언론들이 유튜브나 커뮤니티에 올라온 내용을 경쟁적으로 받아쓰면서 사회적 파장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며 “기성 언론의 무분별한 선정적 보도가 이번 사건에서도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 됐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유튜버들은 레거시 미디어가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서 왔다 갔다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일종의 승인 장치로 느낀다”며 “단순히 ‘유튜버가 어떻게 했다’라고 쓰는 보도야말로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하게 만드는 트리거(방아쇠)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유튜버의 폭로에 언론이 추임새를 넣으며 사적제재 ‘광풍’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광풍 속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앞서 나락보관소는 영상을 삭제할 땐 “피해자와 긴밀히 소통했다”며 또다시 거짓말을 반복했다. 영상 게시를 재개하면서는 “피해자분들의 연락을 간곡히 기다린다. 연락 두절이라 어찌할 방법이 없다”며 합리화했다. 이날 피해자에게 직접 받았다며 판결문을 공개한 다른 유튜버에 대해서도 피해자 동의 없이 판결문 전문을 올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들은 영상을 제작하기 전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기보단 영상을 공개한 뒤 ‘피해자가 싫다면 영상을 내리겠다’고 통보하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윤김 교수는 “피해자가 유튜버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마저 통화가 녹음되거나 또 다른 유튜브 콘텐츠로 소비될 위험이 있다”며 “그럴 때 유튜버는 자신이 피해자와 직접 연락되는 사람이라는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피해자와의 관계를 언제든지 소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가해자 신상공개는 ‘정의구현’이라는 허울을 쓰고 유튜버와 언론의 사익 추구에 이용됐다. 지난 1일까지 구독자수가 4만8000명이던 나락보관소는 신상공개 영상 게재 후 4일 만에 구독자 50만명을 기록했으며 댓글을 통한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유튜버 스스로도 커뮤니티 댓글을 통해 “수익은 달달한 게 맞다”고 밝혔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밀양 사건으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피해자가 유튜버들의 상업적 이윤 창출을 위한 경쟁에 이용되면서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던 과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 사무처장은 “온라인상 조회 수가 폭발하는 사건이라서 그런지 언론이 유튜버 영상 중 네티즌의 분노를 자극할 만한 내용을 인터넷판 중심으로 받아쓰기했다”며 “유튜버들의 일방적 폭로와 다르게 사실 확인과 검증이라는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언론의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 김송이 기자 songyi@khan.kr ·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han.kr
피해자 동의 없는데…누구를 위한 ‘정의 구현’인가
2004년 발생한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신상을 폭로한 영상으로 주목을 끈 유튜버가 “피해자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지만 사실과 달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유튜버는 피해자의 의견을 먼저 묻지도,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영상을 올렸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피해자의 의견은 묵살됐고, 대중의 공분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검증 없는 정보 공개로 새로운 피해자도 만들었다.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는 지난 1일 집단 성폭력 사건의 주동자가 한 식당에서 일한다는 내용의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이 화제가 되자 나락보관소는 다른 가해자들의 신상에 관한 영상을 연달아 올렸다. 나락보관소 측은 “피해자에게 허락을 구했냐는 질문이 많은데 피해자 가족 측과 직접 메일로 대화 나눴고 (가해자) 44명 모두 공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는 글을 유튜브 커뮤니티에 올렸다.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5일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은 가해자 신상 공개에 관한 영상 게시에 동의한 적 없다”고 반박했다. 상담소는 “피해자의 일상회복, 의사 존중과 거리가 먼 일방적 영상 게시와 조회 수 경주에 당황스러움과 우려를 표한다”고 지적했다. 나락보관소는 “동의를 얻었다”는 내용을 제외한 채로 글을 수정했다가 6일 새벽 게시글을 삭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락보관소의 영상물을 계기로 20년 전의 참혹한 사건이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고 관련 영상과 정보가 인터넷에 확산되면서 2차 가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건에 대한 관심이 피해자 회복과 구제, 재발 방지 논의로 이어지기보다 범행의 흉악성과 느슨한 처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범죄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제3자의 사적 제재는 내용과 영향을 피해자가 통제할 방법이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또 본인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건 이후 피해자는 피해 회복을 위한 지난한 노력을 해왔을 것”이라며 “원치 않는 시점에 피해자를 사건 정보에 갑작스레 노출시키는 것은 트라우마를 재점화하는 등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 동의 없는 정의 구현’ 이면엔 사적 이익 추구가 도사리고 있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동의를 가장해 조회 수와 금전적 이익을 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피해자를 앞세워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이 가해자와 연관된 인물로 지목되는 일도 벌어졌다. A씨는 나락보관소가 ‘가해 일당’으로 지목하면서 다른 유튜버가 사업장에 찾아오는 등 피해를 봤다고 했다. A씨는 한 육아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저는 가해자의 여자친구도 아니며 지금까지도 마녀사냥이 계속되고 있다”며 “진정서를 제출하고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락보관소는 잘못을 시인했다.
검증되지 않은 폭로의 위험성이 이번 사태에서 다시 확인된 것이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유튜버가 검증받지 않은 날것의 정보를 알리면서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유통되고 있다”며 “잘못된 정보가 확산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거나 피해 당사자의 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2020년 성범죄자로 추정되는 이들의 신상정보를 임의로 공개하는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가 무고한 시민의 정보를 올리는 바람에 피해자가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최근 ‘서울대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 신상을 유추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지 말자는 당부가 나왔다. 가해자 신상이 퍼지면 피해자 신상도 드러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일수록 신상털기 등 ‘사적 제재’가 기승을 부린다. 이목을 끄는 사건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에 더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은 피의자 44명 가운데 5명만 소년원 보호처분을 받았을 뿐 모두 형사처벌을 피해간 것으로 전해져 공분을 샀다. 권김 소장은 “결국 가해자의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슈가 불거진 것”이라며 “사건 당시의 사법 정의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관심이 ‘복수’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적 보복이 아니라 피해자 지원과 사법 체계 내에서의 처벌 강화로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윤 선임연구위원은 “보복만이 정의는 아니다”라며 “국가권력과 법으로 처벌과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 배시은 sieunb@khan.kr · 전지현 jhyun@khan.kr · 김송이 기자 songyi@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