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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용역업체 바뀌어도 인적 조직은 그대로…고용 승계의무 있다”

김상범 기자

원청 회사가 도급을 주는 용역업체가 바뀌어도, 새 업체는 이전 업체 소속 노동자의 고용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맺은 단체협약까지 승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나왔다. 특별한 자산 없이 인력공급만 하는 두 용역업체 사이에는 영업 양도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 이례적인 판단이다.

9일 서울고등법원 제6행정부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의 용역업체 ㄱ사가 정년 도달을 이유로 노동자 권모씨(65) 등 2명과의 근로계약를 종료한 것은 부당해고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최근 내렸다고 밝혔다.

강원 태백에 위치한 장성광업소는 채굴한 석탄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선탄작업 등을 공개입찰 방식으로 아웃소싱해 왔다. 계약은 대개 1년 단위로 이뤄진다. 2015년 3월 선탄작업을 낙찰받은 용역업체 ㄱ사는 “위탁계약사원은 만 63세에 도달하는 반기 말일에 퇴직한다”는 취업규칙을 새로 만들었고, 그 해 전반기의 마지막 날인 6월30일부로 정년에 도달한 권씨 등과의 근로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권씨가 소속돼 있던 이전 용역업체 ㄴ사는 노조(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만 63세에 도달하는 연말에 퇴직한다”는 단체협약을 맺은 바 있다. 권씨 등은 “ㄱ업체가 단체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라며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사측은 “근로자들을 신규채용 형식으로 고용했을 뿐 종전 업체에서 영업을 넘겨받거나 고용승계를 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폈다. 원청인 석탄공사과 도급계약을 맺었을 뿐 이전 용역업체와는 아무런 계약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노조와 ㄴ업체가 맺은 정년 관련 단체협약을 따를 의무도 없다는 논리다. 중앙노동위원회는 노동자들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1심 법원은 부당해고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2심 법원은 노동자들 손을 들어줬다. ㄱ업체가 특별한 물적 기반 없이 석탄공사 사무실을 이용하며 인력 공급 업무만 했으므로, ‘인적 조직’이 용역 수행에 필요한 핵심 요소라고 봤다. 때문에 장성광업소 용역업체들은 관행적으로 이전 업체 소속 노동자들을 그대로 고용해 왔다. 재판부는 이같은 관행에 비춰볼 때, ㄱ업체는 이전 업체의 인적·물적 조직을 고스란히 이전받는 것을 전제로 입찰에 참여했다고 봤다. 또 이전 업체가 ㄱ업체에 종업원 명부를 건네준 점, 업체가 바뀐 뒤에도 노동자들이 차질 없이 업무를 수행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두 업체 사이에 ‘묵시적 영업양도계약’이 존재한다고 봤다. 이에 따라 ㄱ업체는 이전 업체의 고용계약뿐만 아니라 단체협약까지 승계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단체협약을 어기고 근로계약을 해지한 것은 부당해고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용역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용·단체협약 승계 의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현행 노동관계법은 용역업체 변경 시 고용승계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아서, 소송이 발생하면 상법상 ‘영업양도’ 법리를 주로 원용하는 편이다. 인적·물적 조직이 그대로 타 업체에 넘어갈 때에는 고용관계도 포괄적으로 이전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합병이나 인수처럼 두 업체 간 계약관계가 명확할 때만 고용승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하청·용역업체에 소속된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업체가 바뀔 때마다 대량해고 위기에 맞닥뜨리는 등 고용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노동인권실현을위한 노무사모임의 박성우 노무사는 “청소, 경비 등 거의 모든 간접고용에서 용역업체는 독자적인 업무수행 능력이 없다”라며 “‘인력 장사’로 중간 이윤만 챙기는 용역업체 사이의 실질적인 영업양도 관계를 폭넓게 해석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사건을 담당한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의 김영관 변호사는 “해고 당사자들은 30년 넘게 근무하며 짧은 시간 내에 석탄을 분류하는 작업에 숙달된 노동자들”이라며 “거의 모든 인력공급 업무를 서류상으로만 처리하는 ㄱ업체는 이같은 인적 자산을 종전 업체에서 고스란히 넘겨받은 것이고, 따라서 고용관계와 노조도 승계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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