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일자리보다 일거리
“당신은 여기 ‘고용’되는 게 아닙니다. ‘합류’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거죠.”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택배회사 창고 사장은 택배기사직에 지원한 리키에게 이렇게 말한다. 리키는 자유의지에 따라 일하게 된 것에 뿌듯해한다. 하지만 아무런 보호 없이 ‘노예노동’의 굴레로 떨어졌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동자를 전통적 고용관계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긱 경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반길 수 없지만,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현상이 전 세계 노동시장판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일자리’ 아닌 ‘일감’ 위주 노동이 늘어나는 것이다. ‘가짜 자영업자’ 논란이 끊이지 않는 플랫폼 노동과 관련해 정부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일자리 한 개 늘리기가 정말로 어렵다. 이 관점에서만 보면 대리운전기사 한 명 늘어나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2018년 기준 일자리 총 2342만개
25%가 소멸·다른 사람으로 대체
배달·가사 등 플랫폼 노동 확산
그의 토로가 현상의 양면성을 반영한다. 대기업 정규직 등 안정적 일자리가 늘지 않는 상황에서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들, 기존 노동시장에서 자리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은 확산하는 일감 중심의 불안정 노동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통계청이 작성한 일자리 행정통계를 보면 2018년 총 2342만개 일자리 가운데 넷 중 하나(25.7%)는 사라지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됐다. 한 사람이 1년간 같은 일자리를 계속 유지한 비율은 74.3%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9 고용전망 자료를 보면 국내 임금 근로자의 21%는 임시직이다. 자영업자도 총고용의 20% 이상을 차지했다. OECD 평균(임시직 11.2%, 자영업자 14.2%)을 크게 웃돈다.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경계에 있는 특수형태근로 종사자(특수고용 노동자) 규모도 커지고 있다. 2011년 노동부 조사에서 130만명으로 집계된 특고 노동자는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 정흥준 부연구위원 조사에서는 166만명까지 늘어났다. 새로운 유형의 특고 노동자(플랫폼 노동 종사 추정)도 55만명에 이른다.
상황은 해외도 마찬가지다. 한국보다 노동권 보호가 잘돼 있는 유럽도 2010년 이후 새 일자리의 절반 이상이 임시계약직이다. 리키 같은 노동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급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엔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 재편과 디지털 경제의 확산이 있다. 인터넷에 이어 스마트폰이 보편화하면서 노동자가 작업장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으로 이어주는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유럽노총연구소는 2016년 ‘디지털 경제에서의 노동: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분류’ 보고서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위탁 업무와 프로젝트 업무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할당되면서 ‘일자리’ 개념을 구식으로 만들고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플랫폼 노동은 불안정 노동을 흡수하기도 하고, 없던 일거리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배달노동자나 가사노동자가 전자에 해당한다. 건당 수수료를 받고 파편화된 작업을 수행하는 ‘크라우드소싱 작업자’는 후자에 속한다.
비용 최소화에 관심을 두는 기업은 유연한 작업처리 방식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기존 고용 관계를 벗어난 일이 점점 일반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마존·우버, 배달의민족 사례에서 보듯 디지털 기업들은 기존 고용·노사 관계를 피해 가는 방식으로 사업을 벌인다. 김 부소장은 “디지털 기업들에는 ‘우리 직원’ 개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관계는 그 자체로 소모품처럼 취급된다”고 했다. 따라서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일자리의 질을 떨어트릴 가능성이 크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플랫폼 기업은 규제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 간 경쟁의 판을 훨씬 키우게 된다”며 “일자리 악화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동이 일감 중심으로 변하는 것은 또 기업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일감을 구하는 사람들은 피고용인이 아닌 자영업자 신분으로 플랫폼에 매달려 경쟁을 벌인다. 일감을 받기 위한 자기계발과 노력이 ‘일하는 이’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는 시간과 자원을 투입해 몸값을 높일 수 있는 소수에게만 기회가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극도의 불안정성에 노출된다.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근로기준법상 연차휴가, 유급휴일, 휴게시간 같은 권리가 없다. 퇴직금도 없고, 국민연금은 알아서 내야 한다. 집이든 카페든 공유 사무실이든 일할 장소도 알아서 마련해야 한다. 노동자는 기존 고용관계에서 주어지지 않던 자율성을 얻지만 그 비용이 때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이런 불안정성을 피해갈 수 있는 일자리가 얼마나 될까. 김복순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은 ‘비정규직 고용과 근로조건’ 보고서에서 임금이 양호하면서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고자, 노조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정규직 노동자 비율을 조사했다. 그 결과 2017년 기준으로 전체 임금 근로자의 7.2%만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92.8%는 노동시장 변화의 큰 흐름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다.
일감 얻는 노동자 간 경쟁 늘고
복지 등 기업의 책임은 줄어들어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산업화 시기 대공장을 기반으로 한 노동이 ‘고체’라면 디지털 시대에는 노동이 녹아내려 ‘액체’로 변화하는 현상(melting labour)이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특히 외환위기 이후 노동권이 약화해온 한국 상황에서 이런 현상은 “이미 깨져있던 그릇에 물을 담자 퍽 하고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특고 노동자에 대한 산재·고용 보험을 확대하려는 정부 움직임에 “단기적으론 이런 노력을 계속해야겠지만 빠르게 녹아내리는 노동을 보호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물로 물을 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직장에 고용되면 복지와 노후까지 보장되는 ‘좋은 일자리’는 더 이상 어려워 보인다. 이제 그런 변화에 대한 준비가 우리 사회의 숙제로 주어져 있다.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도록 ‘노동’ 개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