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국공’ 논란

(하) “어렵고 힘든 일은 외주화”…비용 절감 열매는 정규직 차지

이효상·정대연·심윤지·김희진 기자

어떻게 정규직은 살아남았나

<b>정규직들은 “공정한 전환을”</b>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직원들이 5일 서울 오목교역 앞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정규직 전환을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정규직들은 “공정한 전환을”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직원들이 5일 서울 오목교역 앞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정규직 전환을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저희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좋은 일자리가 아니었다.”

1996년 공공기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ㄱ씨(51)의 연봉은 8000만원이 넘는다. 초임 연봉은 낮았지만, 고용안정과 호봉제의 결합은 연봉을 꾸준히 끌어올렸다. ㄱ씨는 “저희는 그대로 있었는데 다른 데가 다 무너졌다”며 “저희 정규직들이 지킨 일자리가 소중한 일자리가 되다보니 청년들이 이 일자리로 들어오기 위해 (비정규직 등과) 서로 싸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의 노동시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3단계 비정규직화를 거치면서 한 줌의 좋은 일자리를 남기고 서서히 무너졌다. 그 결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한국의 노동자 2056만명 중 비정규직은 856만명으로 전체의 41.6%를 차지했다. 그나마 정규직으로 분류된 노동자 중에는 하청업체 정규직, 즉 간접고용 비정규직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10대 재벌기업만 놓고 보면 전체 노동자의 30%(41만명)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1100만 비정규직”이라는 노동계의 구호처럼, 한국의 노동자 절반 이상은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높다.

정규직이라도 다 똑같은 정규직은 아니다. 300인 이상 대기업이고, 노동자를 직접·지속 고용하며 노동조합까지 있는 질 좋은 일자리는 전체의 7.2%에 불과하다(2019년 김복순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두고 벌어지는 ‘을과 을의 사투’ 이면에는 지난 20여년간 분명한 기준 없이 진행돼온 ‘정규직의 비정규직화’가 자리하고 있다. 본디 정규직이던 이들이 비정규직으로 밀려나면서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이 됐고 각종 복지는 사라졌으며, 차별은 일상이 됐다.

[‘인국공’ 논란](하) “어렵고 힘든 일은 외주화”…비용 절감 열매는 정규직 차지

■ 좋은 일자리는 어떻게 무너졌나

입사 10년차인 1997년에 비정규직 된 공항 청소노동자
“회사가 신경 안 쓰려 우리만 넘겼다 생각”…차별 일상화

연구자들은 1990년대 중반을 비정규직화의 출발선으로 본다. 희생양은 대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원청 소속 정규직이던 청소·식당 노동자부터 점진적인 외주화가 시작됐다. 당시 대다수의 노동자는 이들의 외주화에 무관심했다. 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외주화는 모든 부문으로 뻗어나갔다.

1987년 29살이던 강모씨(62)는 국제공항관리공단(현 한국공항공사) 정규직 청소노동자로 김포공항에 입사했다. 호봉에 따라 매년 월급이 올랐고, 기본급의 800%에 달하는 상여가 나왔다. 자녀 학자금 지원, 주택조합을 통한 아파트 분양 등 정직원과 동일한 복지도 누렸다. 하지만 입사 10년차인 1997년 회사는 청소 업무만을 따로 떼어내 용역업체에 넘겼다. 청소노동자들이 반발했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의 침묵 속에 첫 외주화가 완료됐다. 당시 100만원이던 강씨의 월급은 하루아침에 60만원대로 떨어졌고 이후 용역업체가 5번 바뀌는 동안 임금은 최저임금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안정한 신분을 파고든 차별은 일상이 됐다.

정년을 5년 남긴 2018년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강씨는 자회사 소속의 청소노동자가 됐다. 강씨는 “회사가 신경 안 쓰려고 우리만 넘겼구나 했다”며 “입사할 때는 ‘나갈 때 절하고 나간다’고 했는데, 지금은 소름이 끼쳐서 빨리 나가고 싶다”고 했다.

2단계 비정규직화는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리해고제 도입에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그해 5월 정리해고의 첫 파고가 노동운동의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를 덮쳤다. 여당인 국민회의 노무현 총재의 중재로 노사는 277명 정리해고에 합의했다. 현대차 구내식당 정규직 노동자였던 ㄴ씨의 이름도 다른 식당 노동자 140여명의 이름과 함께 명단에 포함됐다. 가장 약한 고리가 가장 먼저 잘려나간 것이다. 정리해고된 130여명의 생산직 노동자는 이듬해 복직했지만, 복직하지 못한 식당 노동자들은 투쟁을 전개했다. ㄴ씨는 “식당이 정리해고되더니, 다음엔 통근 버스 기사님들이, 그다음엔 경비 아저씨들이, 약한 고리부터 소속이 바뀌더라”며 “애들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왔는데 내가 대뜸 ‘정규직이냐’고 물어보는 것 보고 문제가 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취업자 수는 103만명 감소했다. 회사들은 수많은 정규직을 길거리로 내몰았는데, 이내 일손이 부족하자 이들을 임금체계가 다른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했다.

당시 11년차 ‘증권맨’이었던 문순기씨(61)도 그때 정규직 일자리를 잃었다. 문씨는 외환위기 발생 1년 뒤에 권고사직에 동의했고, 이내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됐다. 한국전력에 다니던 형보다 1.5~2배가량 높았던 월급은, 기본급 비중이 낮고 실적에 따른 수당 비중이 높은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시장 상황에 실적이 여의치 않아 6개월 만에 계약직 일도 그만뒀다. 이후 문씨는 정규직 일자리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문씨는 2009년부터 해외 건설현장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프로젝트가 있을 때 1~2년 계약을 맺고 일하고, 일이 없으면 쉬었다. 문씨는 “정규직하고 계약직하고 일하는 거 다 똑같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며 “외환위기는 쉽게 말해 개인적인 삶,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게 했다.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이제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인국공’ 논란](하) “어렵고 힘든 일은 외주화”…비용 절감 열매는 정규직 차지

■ 누가 어떻게 떨어져 나갔나

‘핵심업무’ ‘주변업무’ 불분명…조직 내 파워 게임따라 결정
공항 정규직, 비정규직보다 적게 일하고 돈은 2.5배 더 받아
비정규직화가 부른 ‘좋은 일자리 품귀’ 맥락서 ‘인국공’ 봐야

3단계 비정규직화가 시작된 2000년대는 그야말로 외주화의 시대였다. 민간·공공 부문을 가릴 것 없이 숨가쁘게 외주화가 진행됐다. 이렇다할 기준도 없이 정부부터 ‘핵심업무’와 ‘주변업무’를 나눴고, 주변업무 담당자들은 그대로 주변부 노동자가 됐다.

이모씨는 1998년 한국전력의 100% 자회사로 발전 설비 관리와 유지보수 업무를 하는 한성종합산업(현 한전산업개발)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당시 임금체계는 호봉제로, 한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2001년 정부의 전력산업구조개편 이후 발전 5사가 한전에서 분사되고, 2003년 한전산업개발의 민영화가 추진됐다. 당시 이씨 등 노동자들에게는 300만원의 위로금이 지급됐다. 민영화 이후에도 이씨는 이전과 똑같이 석탄 지급 설비 운전, 발전 설비 정비 등의 동일한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이외의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종전에는 발전사와 한전산업개발의 협업 시 양측의 노동자가 ‘한전 가족’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민영화 이후 양측의 협업은 원하청의 주종관계로 변모했다. 이씨는 “이전에는 서로 심하게 터치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후엔 원청(발전사)의 업무지시가 상명하복의 형태로 이뤄졌다”고 했다. 안전난간 등 안전설비 노후화로 인한 교체를 원청에 요구해도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호봉제는 연봉제로 바뀌었고, 전액 지원되던 자녀 학자금 등 사내 복지는 일부만 남았다. 입사 21년차였던 지난해 이씨는 연봉 4500만원을 받은 반면, 한전 정규직은 지난해 1인당 평균 8300만원을 받았다.

이들은 여전히 설비를 운전하고 정비하는, 어찌 보면 ‘발전’에 필수적인 자신들의 업무가 왜 외주화의 대상이 됐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남윤철 발전노조 사무처장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내가 하는 것보다는 외부에 줘서 하고 싶다는 (한전) 내부의 목소리도 있었고, 그 내부 목소리가 외부적인 상황(외주화 흐름)과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고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

어떤 기준으로 핵심업무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외환위기 이후 코어(핵심) 말고는 다 외주화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러면 코어가 뭐냐’, 이 문제가 남는다”며 “전통적인 ‘사농공상’ 논리나 조직 내부 파워게임에 따라서 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건 다 외주화했다”고 말했다.

외주화된 정규직들이 잃은 것은 자본이 취했다. 지난해 노동사회연구소의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조사를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51.8%에 불과했다. 같은 일을 시키고 절반의 임금만 지급한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인천공항공사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됐다. 정규직 전환 이전 2100명 규모의 보안검색 요원은 교대근무를 하고 약 3300만원의 연봉을 받았지만, 1400여명(전체의 13%) 규모의 정규직은 평균 약 88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2017년 황선웅 부경대 교수). 한재영 공공운수노조 조직국장은 “인천공항 정규직은 노동시간으로 따졌을 때 비정규직의 75%에 불과하지만, 연봉은 비정규직의 2.5배인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인천공항이 갖는 독점적 지위와 용역업체를 통한 비용 절감의 대가는 국가와 정규직들이 차지했다.

인천공항 정규직화 논란을 ‘좋은 일자리의 품귀 현상’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질문은 ‘일에 대한 적절한 대가가 얼마인가’로 이어진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에 대한 합의가 없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사회학 교수는 “한국은 기업별로 어느 회사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격차가 크고 평생 이어진다. 이 때문에 청년들이 처음부터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하는 것”이라며 “적어도 기업별로 초임의 임금 격차는 크지 않은 일본처럼 초임의 임금 수준을 기업별로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 연공급의 기울기를 낮추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


Today`s HOT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사해 근처 사막에 있는 탄도미사일 잔해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황폐해진 칸 유니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