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찬 감독(54)이 헝클어진 이어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이어폰 줄을 입에 대고 말했다. “국장님. 들립니까.” 옆에 있던 정은주 사무국장(47)이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웃었다. “그 이어폰은 마이크 없어요. 그냥 노트북에 대고 말하면 들려요.”
지난 2일 오후 6시 두 사람은 서울인권영화제(5일 종료) ‘관객과의 대화’ 리허설 중이었다. 온라인 화상회의는 처음이다. “비대면 시대에 더 어려워지겠어. 서로 만나야 유대가 쌓일 텐데….”
오후 7시 행사가 시작됐다. “김이찬 활동가님부터 이야기해주시죠.” 화면 속에서 입만 뻥긋하던 김 감독이 허둥지둥 마우스를 옮겨 음소거 해제 버튼을 클릭했다. “반갑습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곳에서 이주노동자 인권 지원 활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날 김 감독은 출품작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정소희·섹알마문 감독) 해설을 맡았다.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쓰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숙소 문제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초대한 (고용)노동부의 무신경에서 비롯됐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가건물을 짓고 거기에 사람을 살게 하고 이득을 취하면 안 되잖아요. 이주노동자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온라인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곳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의 작은 상가건물 2층 지구인의 정류장이다. 사무실과 교육장으로도 쓰이는 모임방, 캄보디아 남성 노동자들이 임시 숙소로 쓰는 공부방이 있다. 작은 캄보디아다. 곳곳에 캄보디아어가 적혔다. 앙코르와트가 그려진 국기,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의 그림,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캠페인 포스터가 걸렸다.
“횡설수설했네. 미리 다 써놓고 말할 걸.” 행사가 끝나자 김 감독이 아쉬운 듯 말했다. 퇴근하려던 정 국장을 붙잡고 다음날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들의 출입국사무소 방문 일정을 이야기했다.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냠 바이 찌어모이 크니어!(‘같이 밥 먹자’는 뜻의 캄보디아어)” 늘 그렇듯 이날도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지구의 정류장엔 휴일이 없다. 낮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고 상담한다. 저녁 식사 뒤 다시 일에 파묻힌다.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진정서를 쓴다. ‘숙소에서 쫓겨났다.’ ‘돈을 못 받았다.’ 새벽 잠자리에 든다. 사연들이 떠올라 잠이 안 온다.
■소수자의 외침 담던 감독님, 지금은 그들의 쉼터 지키는 ‘역무원’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돕는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감독
임금도 못 받고 다른 곳으로 쫓겨난 움마가 찾아왔다
이곳에 캄보디아 노동자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고 한다
김이찬 감독은 주머니에서 디스 플러스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선 자리에서 두세 개비를 연달아 태웠다. 지난 4일 오후 충주고용노동지청 근로개선지도과에서 30분 머물다 나온 뒤였다. 캄보디아 노동자 움마(27·가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캄보디아어로 설명해줬다. 와중에도 그를 찾는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담배 한 대에 불을 또 붙였다. “다시 한번 가서 얘기해봐야겠다.”
김 감독은 이날 오전 9시 움마와 함께 지구인의 정류장 사무실에서 안산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새벽에 잠깐 눈 붙인 뒤 얼마 되지 않았다. 택시가 터미널에 가까워지자 움마가 1만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움마는 김 감독이 시간을 내 함께해주는 게 고마워 택시비를 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움마의 고용주와 근로감독관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충주 가는 버스는 오전 11시30분에 있어요. 지금은 하루 2대밖에 안 다녀요.” 터미널 매표소 직원이 말했다. 오전 9시30분 출발 버스가 없어졌다. 코로나19 때문에 배차가 줄었다. 담당 근로감독관에게 전화해 약속 시각을 늦췄다. 터미널 밖 식당을 찾았다. 아침 겸 점심으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호박엿도 한 개 사 먹었다. 움마는 엿이 낯선지 먹지 않았다. 김 감독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눈가리개를 하고 잠이 들었다. 충주공용버스터미널까지 2시간 넘게 가야 한다.
지난해 9월 한국에 온 움마는 미나리꽝에서 일했다. 처음에 충주로 왔다가 며칠 되지 않아 광주의 미나리꽝으로 갔다. 지난 3월까지 광주에서 일한 뒤 다시 충주로 왔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가라고 하는 곳으로 옮겨 다녔다. 미나리꽝은 하루 12시간씩 일할 때도 많았다. 숙식비를 빼고 월 160만원 정도를 받았다. 움마는 미나리꽝 사장에게 사업장을 옮겨달라고 했다. 자꾸만 옮겨 다니는 게 싫었고 일이 너무 힘들었다. 못 받은 수당도 달라고 했다. 사장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움마는 체불임금을 달라는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노동청에 냈다.
진정서를 제출한 지 1주일도 안 된 지난 10월21일, 사장은 움마를 데리고 고용노동청에 갔다. 움마는 진정 취하서에 서명했다. 취하서엔 체불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고, 취하 의사표시를 철회할 수 없으며 같은 내용으로 다시 신고할 수 없다는 내용이 쓰였다. 통역인은 없었다. 움마는 취하서에 서명하면 일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협조한다는 뜻인 줄 알았다. 취하서 접수 며칠 뒤 미나리꽝을 떠났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 친구 집에 머물 때였다. 사장은 움마에 대해 ‘이탈’ 신고를 했다. 사업장을 무단으로 벗어났다는 뜻이다.
움마는 김 감독이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했다. 김 감독은 움마가 쓴 근로계약서와 취하서를 봤다. 근로계약상 고용주는 여자 이름인 최모씨, 움마에게 지시를 한 사장은 남자였다. 노동청에서 취하서의 최씨 이름으로 서명한 이도 남자 사장이었다. 광주 미나리꽝 일도 움마가 모르는 사이 다른 업자와 추가 근로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움마 의향도 묻지 않고 그를 주고받은 셈이다. 김 감독 도움을 받아 다시 진정서를 냈다.
김 감독과 움마는 오후 2시 조금 지난 시간에 노동청에 도착했다. 노동청에서 근로감독관, 서류상 고용주인 최씨,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장, 일자리를 알선하는 고용지원센터 관계자들을 만났다. 대화는 평행선을 그렸다. 이들은 통역인은 자리에 없었지만, 전화로 설명했다며 추가 진정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다들 자리를 떠난 뒤 김 감독과 움마는 다시 근로감독관을 찾아갔다.
“계약서 고용주는 오늘 처음 봤답니다. 그동안 사장이라고 한 사람은 이름이 뭔지도 몰라요. 이 취하서에 고용주 이름으로 서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가짜 서명이잖아요. 이 복잡한 취하서 내용이 어떻게 전화로 통역이 됩니까. 취하서엔 날짜도 안 쓰여 있어요. 자꾸 짜증 내지만 말고 팩트에 좀 접근하려고 해보세요. 조사를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 감독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담당 근로감독관은 다시 취하서는 정상적으로 접수했으니 추가 진정서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아까 다 설명해 드렸잖아요. 아니 왜 자꾸 그러세요.”
김 감독의 항의에 움마 입장을 조서로 남기기로 했다. 체불임금을 계산하고 시간 외 노동을 입증할 자료를 건넸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잦아들길 반복했다. 조사 막바지 근로감독관이 움마에게 처벌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김 감독은 한참을 길게 설명했다. 근로감독관이 따졌다. “왜 간단한 말을 그렇게 오래 얘기해요.” 김 감독이 되받았다. “검찰에서 기소하고 재판을 받게 되는 절차를 알려줘야 할 것 아니에요.” 움마가 결국 대답했다. “네.”
조서 검토를 마쳤을 땐 오후 5시가 훌쩍 넘었다. 김 감독은 노동청을 나오자마자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무 흥분한 것 같아.” 그는 남에게 모진 말을 못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이주노동자들과 근로감독관을 만날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큰소리를 내지 않고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으면 이주노동자 말에 쉽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조곤조곤 이야기할걸….” 다시 놓친 게 없는지 생각한다.
안산 가는 막차가 끊겼다. 오후 7시 출발하는 수원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수원에서 안산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 해가 질 무렵 김 감독과 움마는 터미널로 천천히 걸었다. 움마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노동청에 도착했을 때부터 여러 번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노동청에서 만난 사장은 “어 오랜만이다” 하며 움마에게 악수를 청했다. 움마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도, 사장이 노동청을 떠날 때도 악수를 거부했다. 김 감독은 왜 인사를 안 했는지 물었다. 움마가 답을 하자 김 감독은 유쾌하게 웃으며 통역해줬다. “사장이 자기한테 안 좋게 해서 인사하고 싶지 않았대요.”
■“우리 편에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김 감독은 한 주에 2~3차례
노동청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간다
근로감독관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김 감독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다. 평소 1주일에 2~3차례 노동청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곤 한다. 전화는 더 자주 한다. 노동자와 함께할 때도, 혼자 갈 때도 있다. 혼자 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터미널까지 간다. 버스에서 내리면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택시를 타고 싶지도 않고, 따로 운동할 시간도 없어서요.”
김 감독은 예전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미얀마 출신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데모크라시 예더봉>(2000)으로 제26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도 받았다. 2007년 안산에 생긴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영상 제작 교실을 맡으면서 이주노동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2009년 지구인의 정류장을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제목으로 구상했던 데서 따온 이름이다. 처음엔 이주노동자들의 ‘영상 공부방’이었다. 김 감독은 이주노동자들이 미디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알아가길 바랐다. 이주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더 알고 싶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생존 문제가 더 중요했다. 임금을 못 받거나 회사에서 쫓겨났다. 빈손으로 고향에 갈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어느 순간 많이 보였다. 한국어와 영어로 손짓, 발짓하며 이야기했다. 2011년 캄보디아어를 공부했다. 교재가 많지 않았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이 선생이 됐다. 각종 노동 문제와 일상 대화는 원활하게 한다. 한국어로 말하는 듯한 억양이 남아 있지만, 그와 이야기하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아주 잘한다”며 후하게 평가했다.
김 감독은 그동안 지구인의 정류장을 대부분 혼자 꾸려갔다. 다른 활동가들이 함께할 때도 있었지만 한동안 혼자였다. 지난 6월 안산 다문화도서관 부관장으로 일하던 정은주 사무국장이 먼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한 건 김 감독에게도 꽤 의외의 일이었다. 정 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김 감독이) 예전 같이 일하자면서 ‘우리도 급여를 줄 수 있다’고 했던 게 생각났어요.” 코로나19 등 여러 이유로 도서관에서 일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정 국장은 2014년 3월부터 6년여 동안 일하던 도서관을 떠나 지구인의 정류장에 합류했다.
김 감독은 지구인의 정류장 상임역무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정 국장은 그런 김 감독을 “유물처럼 보호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 감독이) 어디 가서 기죽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 항상 당당하고 거침없죠. 자존감도 높아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평가도 인상 깊게 남았다. “캄보디아분들이 계속 연락하는 건 김 감독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죠.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한국 사람인데, 우리나라 말을 하고, 우리 편에서 이야기해준다’고요.” 틈틈이 김 감독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둔다. 나중에 다큐멘터리로 만들 생각이다.
정 국장은 캄보디아어를 할 줄 모르지만 불편하진 않다. 도서관에서 여러 나라의 이주민들과 함께 지낸 경험이 있다. 한국어책을 읽도록 돕는 일을 주로 했다. 다문화도서관 운영 경험을 담아 책 <즐거운 다문화도서관>도 썼다. 전문 사서인 그는 ‘독서 운동가’다.
“도서관에서랑 하는 일이 전혀 달라요.”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은 도서관에서 주로 만난 이주민들과는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다. 억울하고 힘든 일을 더 많이 겪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청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는 일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담당 공무원들이 냉담하거나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주노동자 위해 ‘피고1 대한민국, 피고2 사업주’ 상대 소송 준비”
‘전문사서’서 옮긴 정은주 국장
이주노동자들 억울·불편함 목격
관청·병원 등 함께 다니며 ‘소통’
‘인권’ 다루던 최정규 변호사
고용허가제 적나라한 민낯 충격
임금체불 피해 국가배상 준비 중
정 국장은 지난 3일 오후 안산시 단원구의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체불임금 소송에 나선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2명과 함께 갔다. 이들은 소송을 시작하면서 E9 비자(비전문취업)를 G1(난민)으로 변경했다. 소송이 길어져 G1 비자를 연장해야 했다. 비자 연장 신청을 마칠 무렵 직원이 말했다. “최근 3개월치 통장 잔고 증명서를 제출하세요.” 정 국장은 당혹스러웠다. 비자 변경에 시간이 오래 걸려 유효기간이 지났다. 은행은 계좌를 해지했다.
정 국장은 다급히 김 감독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비자 연장 신청은 했지만 ‘사유서를 추가로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고 돌아왔다.
지구인의 정류장 사무실에선 김 감독이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쌤. 전화 왜 또 안 받아요!” “왜? (전화) 안 왔어!” 김 감독 스마트폰은 무음 상태였다.
정 국장은 김 감독처럼 공무원들과 싸우거나 큰소리를 내는 건 어려워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렸다. 정 국장이 온 뒤 여성 노동자들이 병원에 가기 편해졌다. 미등록 체류자도 많고, 한국어로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아 이주노동자들은 병원에 가는 걸 걱정한다. 이날 오후에도 내과와 비뇨기과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소통이 쉽지 않아도 함께하면 힘이 된다.
한 번은 부부인 남녀 노동자가 정 국장을 찾아와 산부인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뜻하지 않게 임신했다고 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심히 낙태 수술이 가능한지 물었다. 정 국장은 그렇게 해줄 수는 없다면서도 일단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산부인과에서 부부는 처음으로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했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고 남편은 한국에 남아 일한다. 정 국장도 그날 함께 들은 심장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만나며 시야를 넓혀갔다. 한 번은 남성 숙소를 두고 옆 방에서 혼자 자곤 하던 남성 노동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왜 그래요?” “몸은 남자 마음은 여자예요.” 정 국장은 이 노동자와 함께 한국의 성소수자 모임에 나갔다. 매니큐어 바르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악덕 브로커
임금 체불·인권 침해가 끝없이 이뤄져도
개선하지 않는 정부가 바로 ‘악덕 브로커’라는 생각 때문이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다른 이주민 단체와 교류·연대한다.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인 방글라데시 출신 한국인 섹알마문 감독(46·2009년 귀화)은 김 감독을 2012년부터 알고 지냈다. “감독님은 평소엔 재밌는 분이에요. 집회에 가서 발언할 때는 엄청 강하죠.”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를 공동연출한 마문 감독은 이주노동자들이 농촌에서 겪는 문제를 두고 지구인의 정류장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주노조엔 공장·제조업 분야의 조합원이 많아요. 이주노동자들이 제일 힘들게 일하는 곳 중 하나가 농촌인데, 그들 목소리를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처음으로 냈고, 사회적으로 이슈화했어요. 정말 큰 역할을 한 거예요.”
이주민과 장애인 인권 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2017년 12월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김 감독을 처음 만났다. 변호사 10여명이 참여한 이주인권사례모임에 김 감독을 강사로 불렀다. “정말 충격을 먹었어요. 정신이 번쩍 뜨였죠. 이주민 인권을 조금 등한시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감독님과 조금 더 함께 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최 변호사는 지구인의 정류장이 이주노동자 문제의 최전선에 있다고 했다. “지구인의 정류장에 찾아오시는 분들 이야기를 모으면 대한민국 고용허가제의 민낯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만 너무 적나라해서 지치죠.”
최 변호사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지구인의 정류장이라고 했다. 그만큼 신뢰가 쌓였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그 어떤 이주민 단체보다 확장성 있는 이슈를 선점해요. 사례가 많기 때문이죠. 이주노동자 관련 언론 보도를 모니터링하면 지구인의 정류장이란 이름이 빠지지 않아요. 이주노동자들의 외침은 대부분 묻히곤 하죠. 감독님은 그 외침을 어찌 됐든 살려내요. 옆에서 보면 하나하나의 외침을 진정성 있게 듣는 것 같아요. 쉽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김 감독은 최 변호사와 함께 임금체불 피해를 겪은 이주노동자를 위한 국가배상 소송을 기획하고 있다. 한국인 노동자에게도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건 힘든 일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체류 신분이 불안정한 이주노동자에겐 더 어렵다. 이주노동자들은 체불임금 일부만 받고 합의하거나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간다. 소송을 해 이겨도 사업주가 임차 농업인인 경우가 많아 집행 재산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체불임금을 지급하라’는 판결문은 종이 쪼가리로 전락하는 일이 흔하다. 국가에서 체불임금 등을 보전해주는 ‘소액체당금 제도’는 5인 미만 농어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판결문이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하고 고민하던 김 감독과 최 변호사 같은 활동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시민 모금을 받아 이주노동자에게 체불임금을 먼저 주는 ‘크라우드 펀딩’도 생각해봤다. 소송으로 돈을 받아내 다시 후원자들에게 돌려주자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를 관리할 인력이 없다. 결국 국가를 상대로 소송하는 방향을 택했다.
피고1 대한민국, 피고2 사업주. “공동으로 (연대하여) 원고에게 체불임금 및 퇴직일로부터 14일이 경과된 시점부터 다 지급할 때까지 근로기준법 소정의 연 20%의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계획 중이다. 국가 상대 소송을 하는 건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독점적으로 알선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 정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금체불과 인권 침해가 끝없이 이뤄져도 제대로 개선하지 않는 ‘악덕 브로커’라는 게 김 감독의 생각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정부가 먼저 체불임금을 지급하고 체불 사업주로부터 구상권을 행사하는 전액 체당금 제도를 도입하고, 체불임금을 받을 때까지 체류자격을 주도록 하는 게 목표다.
■“변호사·노무사도 아니면서…”
“변호사도 노무사도 아니면서 왜 그러냐”는 물음에 답한다…“이곳은 ‘지구인의 정류장’이니까”
“변호사·노무사도 아닌데 자꾸 왜 이러세요?” 김 감독이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이주노동자들의 말을 통역해주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그에게 담당 공무원들이 하는 말이다. 그도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봉욱 전 대검차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윤대진 사법연수원 부원장…. 같은 시기 학창 시절을 보낸 동문들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인사들이다. ‘변호사가 되려고 한 적이 없었냐’고 물으면 “대학 입학했을 당시 말고는 한 번도 그런 생각(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해본 적 없다”고 했다. 사법시험은 보지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 ‘군사정권’ 시기였다. 권력을 꿈꾸고, 부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변호사나 노무사가 돼 돈을 벌고 싶지 않다고 했다.
최 변호사는 김 감독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까지 활동하는지 궁금했다. “감독님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가 실현되는 걸 외면하고 영화를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이전에는 소수자들 외침을 영상으로 담아냈고 지금은 상담으로 담아내고 있죠. 영화를 만드는 것과 상담을 하는 일은 같은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김 감독은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한다고 했다. “감독님이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고 희생한다”(최 변호사)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과대평가이고 오해에 기초한 평가죠.” 오히려 자신이 “약삭빠른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저는 50대 중년 남성인데 20대 청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게 좋아요. 젊은 친구들이 도와달라고 찾아와요.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 다행이죠. 제 또래 사람들은 이권을 가지고 다투고 갈등하고 다양한 걱정을 하고 살아요. 저는 그런 고민에서 자유로운 편이죠. 은퇴를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지구인의 정류장 일이) 무리한 일도 아니에요. 이주노동자 인생 전체를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체류 기간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아쉬움이 커요. 결국 사람을 알아가고 싶은 호기심이 큰 것 같아요. 피해자 아니면 위험한 자로 그려지는 외국인이 아니라, 풍성한 그 사람만의 내면을 이해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제 또래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경험이죠.” 이 말을 듣자 왜 단체 이름을 ‘지구인의 정류장’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했다.
지난 8일 오후 4시. 사진 촬영을 위해 다시 지구인의 정류장을 찾았을 때 김 감독은 지난주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김 감독은 이날 오전 8시쯤 퇴근하면서 출근하던 정 국장과 마주쳤다. “오후 4시에 출근할게요.” 전날도 근로감독관과 전화로 한바탕 말씨름을 했고, 체불임금에 대한 진정서를 정리하느라 밤을 새웠다. 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된다.
김 감독은 정 국장과 쉼터에 지내는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사진 촬영 중에 계속 농담을 했다. 이들은 서로를 격의 없이 대했다. “아이 부끄러운데, 더 이쁘게 나와야지.” 한국어와 캄보디아어를 섞어가며 말했다. 촬영이 끝나자 김 감독이 말했다. “아 출출하다.” 사무실 구석에 놓인 팝콘 과자 한 봉지를 찾아냈다. 봉지를 뜯어 책상에 놓고는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평소 좋아하는 군것질거리가 보이면 지나치지 않는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김 감독을 만날 때마다 이 안부를 묻는다. “록꾸루(캄보디아어로 선생님이란 뜻), 식사하셨어요?”
이주민 단체들이 바라본 국내 이주노동자 실태
이주노동자들은 “일 많이, 월급 조금”이라는 말로 자신의 노동조건을 설명하곤 한다. 열악한 노동조건 원인 중 하나는 2004년 8월부터 시행한 고용허가제다. 대상은 어업, 농업, 건설업과 300인 미만 제조업 등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 곳이다.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에 상대적으로 급여가 낮다.
이주민 단체들은 고용허가제를 ‘현대판 노예제’라고 비판한다. 고강도 노동, 저임금에다 고위험 업종이 많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는 19만9451명(16개국)이다. 상반기 기준 산업재해를 당한 이주노동자 수는 3542명, 사망자는 47명이다.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피해자는 3만7798명, 사망자는 610명이다.
“월급 조금”도 못 받는 사례가 늘었다. 임금체불 신고액은 지난해 처음 1000억원을 돌파해 약 1500억원(‘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 신고현황’,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실)을 기록했다.
이동의 자유도 없다. 우선 다른 업종으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휴업이나 폐업 등 사업주 귀책 사유가 아니면 3년간 3회(재고용 기간 2회) 같은 업종의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한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임금을 안 주거나 인권 침해를 당해도 사업장을 옮기기 어렵다. 고용주가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절대적인 갑이다.
비닐하우스 같은 임시 주거시설도 고용허가제 아래서 합법이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는 숙식을 제공한 뒤 그 비용을 징수할 수 있다. ‘외국인 근로자 숙식 정보 제공 및 비용 징수 관련 업무지침’에 따른 것이다. 아파트·단독주택·다세대 주택 등에서 숙식을 제공하면 매월 통상임금의 20%를 상한액으로 징수할 수 있다.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은 13%까지 거둔다. 이주노동자의 자국어 서면동의서와 숙식 정보 제공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면 사전 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업장 중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5인 미만’인 곳이 많다.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렵다. 근로계약을 맺을 때 어떤 숙소에서 머물지 제대로 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근로계약을 맺은 고용주가 실제 사용자가 아닌 경우도 많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정보를 주지도 않는다. ‘을’의 신분에서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기도 힘들다. 지구인의 정류장 같은 이주민 지원 단체는 정부의 사업장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족하다고 계속 지적한다.
이들 단체는 고용허가제를 ‘노동허가제’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이주노동자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게 노동허가제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