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부품을 만드는 내연기관 노동자들읽음

김한솔 기자

텀블러·채식 등 친환경 고민할 때 산업전환 과정서 실직하는 사람도

불평등하게 미치는 기후위기 영향 노동자에게 일방적 전가는 안 돼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 플라스틱 생수병에 든 물을 한 잔 마신다. 플라스틱 사용에 죄책감을 느끼며 병에 붙은 비닐을 제거하고, 병은 분리수거함에 넣는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지만, 디젤 자동차를 타고 출근을 한다. 라디오에서 기후변화로 폭염과 폭우 같은 이상기후가 잦아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직장 동료는 채식을 한다. 동물을 위해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당신은 그 동료를 존중하면서도, 어쩐지 함께 밥을 먹으면 불편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퇴근 후에는 에코백을 메고 마트에 들러 소고기를 산다. 6월 초이지만, 날이 덥다. 당신은 전기세를 걱정하면서 에어컨을 켠다. 잠들기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기후변화로 갈 곳 잃은 북극곰 사진을 보고 관련 환경단체에 소액을 후원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은 누구나 탄소를 배출한다. 보통의 ‘당신’은 플라스틱 제품을 쓰고, 디젤이나 가솔린 같은 내연기관 자동차를 타고, 육식을 하고, 화석연료로 만들어진 전기를 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일터’ 자체가, 일터에서 만들어지는 ‘상품’이 과도한 탄소를 배출한다. 그런 일터에서 배출되는 탄소량은 ‘당신’이 텀블러를 쓰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한다고 상쇄되지 않는다. 이들의 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사라져야만 하는 일이 됐다.

기후위기의 결과는 불평등하다. 누군가는 일회용품 대신 다회용기를 쓰며 작은 불편을 감수하면 되지만 누군가는 평생 해온 일을 그만두고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이들 덕택에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당신에겐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다. 이들은 화석연료를 태워 전기를 만드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했고, 화석연료를 태워 구동하는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들었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의 소멸과 전환은 피할 수 없다. 석탄화력발전은 2030년 초까지 폐지가 예고됐다. 내연기관차는 전기차로 바뀌고 있다.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같은 전환이 필수적이라면 전환 과정 역시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손실을 나눠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기후위기에 대응해 어떤 지역이나 업종에서 급속한 산업구조 전환이 일어날 때, 과정과 결과가 모두에게 ‘정의로워야’ 한다는 개념이다.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전환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안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향신문은 ‘기후위기 시대의 전환’ 기획을 통해 전환 대상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석탄 발전’ ‘내연기관’ 이라는 큰 이름에 가려져 있는 노동자 삶으로 들어가 그들이 체감하는 전환의 상황은 어떻고, 바라는 건 무엇인지 물었다. 기후위기도, 산업 전환도 결국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엔진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 노동자 D씨는 지난달 기자와 만나 “위기의식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로 전기차 전환에 속도가 붙으면서 D씨처럼 내연기관용 부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불안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전기차에는 엔진·변속기 등 내연기관차의 핵심 부품들이 필요가 없다. 그가 말한 위기의식은 이 부품들처럼 자신들도, 자신들의 일터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엔진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 노동자 D씨는 지난달 기자와 만나 “위기의식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로 전기차 전환에 속도가 붙으면서 D씨처럼 내연기관용 부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불안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전기차에는 엔진·변속기 등 내연기관차의 핵심 부품들이 필요가 없다. 그가 말한 위기의식은 이 부품들처럼 자신들도, 자신들의 일터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내가 만드는 부품,
전기차엔 쓸모없는데
일터가 남아나겠나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자동차를 타는 것이다. 자동차는 시동이 켜진 순간부터 꺼질 때까지 화석연료를 태운다.

A씨는 군 제대 직후부터 22년간 자동차 엔진 부품을 제작하는 1차 하청업체에서 일했다. 내연기관 자동차 한 대는 부품 3만개를 조립해 만든다. 각 부품은 저마다 역할이 있지만 핵심은 엔진 부품이다. A씨 회사도 엔진 부품을 생산한다. “과거에는 다른 부품들도 만들었는데 사업이 확장되면서 엔진 부품 하나만 주력으로 하게 됐죠.”

내연기관 자동차가 전기차로 전환되면 핵심이 바뀐다.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다. 화석연료 대신 충전된 전기 배터리에서 동력을 얻는다. 내연기관차 부품의 약 30%는 전기차에선 필요가 없다. A씨가 만들던 엔진 부품이 그런 경우다. A씨도 이를 알고 있다.

“없어지겠죠. (생산이) 축소될 수도 있겠지만, 안 좋은 경우엔 사라지겠죠. 일자리가 사라지는 거예요.”

내연기관차 부품 30%는 전기차에 안 들어가
엔진 주변 부품 만드는 회사는 거의 절멸한다고 보면 돼
하청 내려갈수록 자신이 만드는 부품이 사라지는지도 몰라
완성차 노동자들도 라인자동화·전환 배치 등 불안 시달려

내연기관 퇴출은 석탄화력발전소 폐지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정의로운 전환’ 가능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사실상 1개 업체(현대자동차그룹)가 독점하는 독특한 구조다. ‘공적 영역’에 속하는 석탄화력발전소와 달리 완전한 ‘민간 영역’이기도 하다. 정부가 얼마큼 의지를 가지고 역할을 하느냐에 ‘정의로운 전환’ 승패가 달려 있다. 전기차 전환에 따른 부품 수 감소, 일자리 상실 등 피해는 부품사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경향신문은 이미 시작된 전환 과정에서 불안해하는 자동차 부품사 노동자들을 만났다. 사실상 원청이 한 곳인 자동차업계의 특성을 고려해 인터뷰 대상자 이름과 소속 회사는 익명화했다. 부품 종류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 ‘탈내연기관’을 이끄는 기후위기

“전 환경주의자처럼 생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거든요.” 26년째 자동차 차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B씨가 말했다. 그는 일상에서 기후변화를 체감한다. “겨울인데 따뜻하고, 이른 봄인데 너무 덥고…. 요즘 기후는 뭐랄까, 정해진 틀을 벗어나 너무 불규칙해진 것 같아요. 더 이상 기후위기를 방치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변속기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C씨는 “지구가 몸살을 앓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자꾸 천재지변이 일어나잖아요. 아시아에서 잘 일어나지 않던 일들도 일어나고요.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탈내연기관’을 이끄는 강력한 흐름은 기후변화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18년 발표한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에서 2017년 현재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구 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도 상승했으며, 기온이 1.5도 오를 경우 자연과 인간 모두에 위험한 기후 상태가 된다고 경고했다.

IPCC는 지구 기온 상승폭을 ‘1.5도 미만’으로 제한하려면 인간 활동에 따른 전 지구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최소 45% 줄이고, 2050년에는 ‘넷제로’(이산화탄소 순배출 제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산업체계의 빠르고 광범위한 시스템 전환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특별보고서가 발표된 후 각국에서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쏟아냈다. 화석연료에서 추출한 가솔린·디젤을 연료로 쓰는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도 그중 하나다. 유럽 각국은 2025~2040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한국에선 대통령 직속 국가기후환경회의가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의 국내 판매를 금지하라고 권고했다. 지난해 발표한 한국판 그린뉴딜 계획에 따르면 2025년까지 전기차 113만대, 수소차 20만대가 보급된다.

■ 사라지는 부품을 만드는 사람들

문제는 일자리다. D씨는 엔진 부품을 만드는 1차 하청업체에서 일한다. 회사는 엔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수십년간 대량생산해왔다. 쇳물을 만들어 주조를 하고 열처리를 하는 모든 공정이 회사 안에 갖춰져 있다. 하지만 회사가 오랫동안 돈과 인력을 투자해 다져놓은 이 시스템은 전기차로 전환될 경우 무용지물이 된다. 전기차는 엔진 부품 자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 부품이 사라지는 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죠. 내일 아침 전기차로 바뀌게 된다면 회사의 존립 자체가 문제가 되죠. 저희가 일할 공간도 없어지는 거죠.” D씨가 말했다. ‘탈내연기관’ 흐름은 이미 느껴진다. 신형 엔진이 더 이상 개발되지 않고 있다. “현재 저희가 생산하고 있는 제품들도 최근 만들어진 엔진 사양을 업그레이드하는 정도예요. 그렇게 된 지 몇년 됐어요.”

사정은 변속기를 제작하는 C씨 회사도 마찬가지다. “엔진 주변에 들어가는 부품 만들던 회사들은 거의 절멸한다고 보면 돼요. 예컨대 엔진 밸브 쪽에 있던 고무 같은 것도 이젠 필요 없는 거죠. 전기차에는 배터리만 딱 있으면 되니까요.”

사라지는 부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엔진과 변속기지만, 전기차로의 전환은 미처 생각지 못한 종류의 부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차체는 바뀌는 게 없을 거라고들 생각하잖아요? 아니에요. 차체 소재가 바뀝니다.” B씨가 말했다. 한 번 충전된 전기차가 오래 달리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배터리 수를 늘리거나 차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배터리를 늘리면 가격도 올라간다. 남은 것은 차체를 가볍게 만드는 것뿐이다. “기존 제조 공정에서는 차체 소재로 철을 썼는데, 전기차에서는 알루미늄 합금과 복합소재 등을 사용해야 해요.”

소재가 바뀌면 소재를 결합시키는 용접 방식도 바뀐다. 용접 방식이 바뀌면 기계도 바뀐다. 기계가 바뀌면 작업 방식도 다시 익혀야 한다. 결국 기존 ‘철’에 맞춰져 있던 공정 자체가 전부 수정돼야 한다. “현재 시스템은 포스코나 현대제철 쪽에서 가져온 철판을 잘라 프레스에 넣고 차체 형상을 만들어요. 알루미늄과 관련해선 정해진 공정이 없어요. 기존에 차체를 철 기반으로 해왔던 모든 회사들에서 설비와 기술 변화가 필요한 거죠. 차체 부분이 달라지지 않을 거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 무엇이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실 이게 어디에 쓰이는 부품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만들던 부품이 사라져 걱정인 이들의 밑에, 자신이 만지는 부품이 자동차의 어디에 쓰이는 부품인지 모르는 이들이 있다. E씨는 2차 하청업체에서 일한다. 그는 하나의 부품에 들어가는 더 작은 부품을 만든다. “정확히는 (무슨 부품인지) 파악을 못하겠어요. 차 시트 같은 데 들어가기도 하는 것 같고요. 프레스에 고무를 주입해 찍어내는 일을 해요.”

그는 전기차 전환 흐름을 알고는 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한다. “저희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거의 알 수 없어요. 얼마 전 노조에서 (정의로운 전환) 토론회를 하고, 비디오도 보여주고 하니까 ‘아, 이런 게 있구나’ 하고 서서히 깨우치는 거죠. 회사에서는 ‘앞으로 장기적으로는 전기·수소차로 간다’고만 하고 다른 말은 없었어요.” 그에겐 산업 전환 같은 큰 문제보다 열악한 임금 등 매일 일하는 작업환경의 변화가 더 시급하게 느껴진다.

E씨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2차 이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자신들이 매일 만지는 부품이 정확히 자동차의 어느 부위에 붙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F씨 상황도 비슷하다. 그는 프레스에서 찍어낸 부품 표면의 ‘버(burr)’를 제거하는 5차 하청업체서 일한다. 부품을 포장·납품하기 전 까끌까끌한 부분을 없애기 위한 표면처리 과정이다. 만드는 제품의 구체적인 쓰임새를 모르다보니 전기차로 전환되면 일감이 얼마나 줄어들지 감을 잡기 어렵다. “내연기관 부품의 70% 정도가 저희 회사로 들어오는데, 부품 자체가 줄어들면 저희한테 오는 물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어떤 제품이 없어지고 살아남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거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거예요. 알면 저희한테 좀 알려주세요.”

사라지는 부품을 만드는 것이나 자기들이 만드는 부품이 사라지는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나 상황은 좋지 않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해결책을 찾기가 더 어렵다. “사실 2·3차 업체는 연구·개발 능력이 제로예요. 프레스 기계는 업체에서 사지만, 그걸 찍어내는 금형은 1차 하청에서 빌려주는 방식이에요. 이렇게 재료를 공급받고, 거기에 사람만 투입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에요. (사실상) 인력파견업체처럼 운영되기 때문에 굉장히 열악하죠.” B씨가 말했다.

■ 완성차 노동자들도 불안

전환에 대한 불안은 완성차 조립을 하는 노동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현대 아이오닉5(전기차) 라인에 원래 엔진 조립 공정이 있었는데, 거기 있던 인원 38명이 다 다른 곳으로 전환배치됐어요. 엔진·변속기·소재 쪽 노동자들은 고용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하고 있죠.” 김용호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미래변화대응TF팀 1팀장이 말했다. 현대차지부는 최근 임금단체협상을 앞두고 관심 사안에 대한 조합원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1위가 임금, 2위가 미래차 대응이었다.

완성차 노동자들이 ‘당장의 해고’를 걱정하는 건 아니다. 사업장이 고령화된 만큼 정년퇴직으로 인한 자연감소 요인도 있다. 현대차지부에서는 2025년까지 1만2000~1만4000명(조합원 수 기준)이 정년퇴직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 상황에서는 오히려 인원 충원이 필요한 수준이다.

하지만 일터의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을 ‘해고’로만 한정할 수 없다. 내연기관 조립 수요 감소에 대응해 전환배치를 해도 오랫동안 해온 공정을 중단하고 갑작스럽게 다른 공정에 투입되는 건 부담스럽다. 최선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정책기획1실장은 “(새로운 공정을 익히는 데) 적게는 한 달, 많게는 1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전환배치가 되고 있지만, 전기차 전환 비용 절감을 위해 감원, 라인자동화 등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우 직접적인 일자리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완벽하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국내 자동차산업은 완벽한 피라미드 구조를 갖고 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사실상 유일한 원청인 현대차·기아가 있다. 그 밑에 1차 하청업체가 있고, 그 밑에 2·3차 이하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업체 규모나 기술력은 떨어지고 사업장 상황도 열악하다.

‘완벽하게 눈치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의 결과는 예상 가능하다. “현대차를 독점으로 만들어놓은 뒤로 전속거래(한 곳과만 거래하는 것)가 심화됐어요. 그때부턴 연구·개발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현대차에서 그냥 하라는 대로 해도 성장을 했거든요.” 자동차산업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항구 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의 말이다.

■ 투자할 기술도, 자금도 없는 부품사들

엔진 부품을 만들던 D씨의 회사는 몇년 전부터 전기·수소차에 들어가는 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회사가 스스로 노력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D씨가 말했다. 내연기관 부품만을 만들던 부품사가 전기·수소차 부품에 투자하는 건 흔치 않다. 1차 하청업체라도 대부분은 그럴 만한 기술력도, 기술 연구에 투자할 금전적 여력도 없다. D씨 역시 “운이 좋은 편”이라고 느낀다.

원청 눈치 보기 바빠 연구·개발 엄두 못 내
하청들은 문 닫을 수도

A씨 회사도 엔진 부품을 만드는 1차 하청업체지만 상황은 다르다. 친환경차 전환에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 관련 연구·개발도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회사 측도 걱정만 할 뿐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그는 그런 회사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가 보기에 1차 하청업체들 중 새로운 부품 개발에 투자할 수 있는 곳은 극소수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원청의 기술력에 의존한 제품을 만들어왔다. “1차 중에서도 중견기업 이상이면 나름대로의 기술 연구도 하고 준비를 갖추고 있을 텐데, 그 정도 규모가 안 되는 사업자들은 대부분 원청에서 주는 기술을 조금 개량한 수준의 기술인 거죠.” A씨가 말했다. 지금, 다시 시작하기에는 ‘실패 비용’을 감당할 여유가 없다.

연구·개발 역량이 뒤처진 건 부품사가 게을렀기 때문일까. 구조적으로 동력이 없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연구·개발 해봤자 원청에서 사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 ‘코드’라는 게 있거든요. 시트 쪽 코드, 프레스 쪽 코드, 영역별로 부품사를 묶어놓은 거죠. 코드별로 2~4개까지 업체가 있어요. 원청이 가격과 회사 가치 등 전략적인 관점에서 아이템을 나눠줘요. 그런 상황에서 현재 기존 아이템에서 벗어나 다른 아이템으로 넘어가는 건 정말 쉽지 않아요.” B씨가 말했다.

■ 버티거나, 사라지거나

전기차 전환 대비책 세울 여유 없고
뭔가 개발해도 원청이 안 사면 그만
부품사들 상황 보며 버티기 할 수밖에

결국 대부분의 부품사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버티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새로 투자를 해 전환할 여력이 안 되는 사업장은 남은 내연기관 물량을 가지고 버틸 수밖에 없는 거죠. 그 기간 동안 돌파구를 찾으면서요. 그것조차 안 되는 사업장들은 문을 닫게 될 거예요.” A씨가 말했다.

부품사의 경제적 어려움은 이미 수치로 나타난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이 지난달 31일 발간한 산업동향보고서에는 국내 110개 자동차 부품사들의 총매출액이 분석돼 있다. 부품사 매출은 전년 대비 1조9513억원 감소했다. 부품사 중에서도 규모가 큰 곳과 작은 곳의 격차가 커졌다. 고용인원 파악이 가능한 부품사 105개를 대기업(62개)과 중소기업(43개)으로 나눠 비교했더니 대기업 매출이 2.67% 감소하는 동안 중소기업은 6.61% 줄었다. “코로나19가 있어서 정부가 돈을 왕창 풀었잖아요. (부품사들은) 그래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연구위원이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업체는 주력 분야가 아니더라도 ‘내연기관과 관련된 품목이기만 하면’ 일감을 끌어오려는 곳도 있다. D씨가 말했다. “모터 만들던 회사에서 와이퍼를 만들기 위해 준비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미래차에도 와이퍼는 존재할 테니까요. 부품 자체가 3분의 1 정도 줄어든다고 하니까, 지금은 무조건 살아남는 게 중요한 거죠.”

■ ‘기업에만 정의로운’ 전환

정부 정책은 기업에만 정의로워
재교육 전에 일자리부터 만들어놔야

노동자들이 보기에 현재의 전환 과정에서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은 ‘기업에만’ 정의롭다.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은) 이미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주도하고 있는 기업에 ‘세계 일류가 되라’고 하면서 돈을 더 투자해주는 방식이죠. 그건 고용창출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 기업을 ‘초일류’로 만들어주기 위한 거니까, 일반 국민을 위한 거라고 보이진 않아요.” B씨가 말했다.

A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솔직히 지금 정부 역할은 ‘대기업 퍼주기’예요.” 그의 말이 이어진다. “정부가 노리는 게 ‘낙수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린뉴딜 예산만 봐도 대기업 중심 재편으로 편성돼 있지 않나요. 기업에는 그렇게 투자하는데, 그 과정에서 직장을 잃고 떨어져 나오게 되는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지원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정부는 지난해 한국판 그린뉴딜 예산을 발표하면서 전기차 113만대, 수소차 20만대 보급 등 ‘친환경 모빌리티’에 20조3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내연기관 산업 전환에 그린뉴딜 전체 예산 73조4000억원 중 가장 많은 부분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전환 과정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11조3000억원이 들어가는 그린에너지 부문의 ‘석탄발전 등 사업축소가 예상되는 위기지역 대상 신재생에너지 업종전환 지원’ 항목에 ‘그린 모빌리티’가 포함돼 있을 뿐이다. 당시에도 ‘그린뉴딜이 아니라 사실상 현대차 성장 전략’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 ‘어떤 재교육’이어야 할까

정부는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에서 피해를 입는 산업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 수요를 파악해 맞춤형 직업훈련, 재취업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산업별 구분도, 직업훈련 기간과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선언적 문구에 불과했다.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취업 기회를 열어주려면 일자리가 존재해야 하잖아요. 일자리가 없는데 교육만 시킨다고 해결이 되나요? 유럽에서 조선소가 다 망했지만, 그 조선소에서 해상풍력 플랜트를 만들 때 조선소에서 해고됐던 이들을 재고용해서 만들고 있대요. 새로운 산업의 일자리 창출이 정부에서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B씨가 말했다.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재교육은 일자리 전환뿐 아니라 장기적인 ‘노동 안전’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전동화에서는) 고전압 부품들이 많아져서 잘못하면 감전사할 수 있어요. 지금은 부품 색깔이 다 똑같지만, 전기차에서는 부품 색깔이 달라져요. 고전압은 예컨대 노란색으로 칠해놓고 해당 부품 작업 시에는 석면장갑을 끼고 하고, 전기감전이 안 되게 접지작업도 사전에 돼 있어야 해요. 재교육 과정에서 실제 실습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조심하라고 안전교육을 해야 하는 거죠.” 이 연구위원이 말했다. 설사 재교육 시스템이 갖춰지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완성차 업체가 아닌 부품사에는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이 연구위원은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차 업체를 먼저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은 재교육할 인력도 마땅치 않다. “현실적으로 인력양성을 하려고 해도 가르칠 사람이 없어요. 하다못해 대학 교수님들도 대부분 기계공학을 전공하셨어요. 이분들이 할 수가 없는 거죠.” 이 연구위원의 말이다. 그는 재교육을 위해서는 정확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인력을 먼저 배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대학에서 교수 요원부터 교육한 뒤에 그 사람들이 나와서 재교육을 해야지, 아무 데나 맡겨놓으면 돈만 날리고 효과도 없어요.”

■ ‘전환기 안전망’이 필요하다

“왜 매번 고용이 문제가 되느냐? 우리나라는 직장을 잃으면 삶 자체가 흔들리고 깨져버리는 구조잖아요. 일을 놓치게 되면 국가가 책임지고 보호해주는 안전망이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몇 개월 아닌가요? 몇 개월 안에 뭔가 하지 못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A씨가 말했다.

이미 전환에 따른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재교육을 통한 일자리 전환’ 이전에 ‘전환기 안전망’을 구축해 달라고 요구한다.

“새로운 일자리, 기존 일자리에서 파생된 일자리로 가기 위한 재교육도 중요한 축이지만 실직자는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이성희 민주노총 금속노조 정책국장이 말했다. “실직한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이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부가 세팅해놓은 일자리로 가세요’라고만 교육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미래에 생기는 일자리는 정부가 계획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 일자리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사회 안전망이 필요하죠.”

이 국장은 “전환기에는 5년이든, 10년이든 단기적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전환기 안전망’이 필요하다. 그게 정의로운 전환의 한 축”이라고 했다.

이런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선 전환의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논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하바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은 “부품사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목소리가 부족해서 (전환 과정에서) 협상을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중간지원 조직을 만들어서 의견수렴을 받거나 정책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도와줄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며 “정부 차원에서 부품사들에 대한 전수 조사나 체계적인 모니터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B씨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고용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작정 죽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연착륙시킬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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