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측 업무’라던 택배 분류…기사들 85%, 오늘도 ‘까대기’ 중읽음

박채영 기자

‘과로사 방지’ 1차 사회적 합의 5개월, 변함없는 현실

지난달 6일 서울 시내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택배기사들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1차 합의안에서 택배 분류작업을 택배사 책임으로 명시했시만 현장에서 일하는 택배기사들은 “여전히 분류작업이 택배기사들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지난달 6일 서울 시내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택배기사들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1차 합의안에서 택배 분류작업을 택배사 책임으로 명시했시만 현장에서 일하는 택배기사들은 “여전히 분류작업이 택배기사들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CJ대한통운 측, 일부 시간만 ‘도우미’ 배치…일손 부족
여전기사들 배송 전 분류 ‘무임 노동’…가족·자체 알바까지 동원
택배노조 6500명 오늘 “9시 출근, 11시 배송 출발” 단체행동

택배기사 김모씨(35)는 요즘도 아침 6시30분에 출근해 9시에 첫 배송을 나가기 전 2시간 반 분류작업을 한다. 소위 ‘까대기’라고 불리는 분류작업은 대형 간선트럭이 터미널에 싣고 온 물품을 택배기사가 맡은 구역별로 나누는 과정이다. 그가 일하는 김포의 한 CJ대한통운 터미널에는 지난 1월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의 1차 합의가 발표된 이후 택배기사 5명 당 1명의 분류도우미가 배정됐다. 하지만 분류도우미의 근무시간이 오전 9시~오후 2시인 탓에 오전 6시30분~9시 분류작업은 여전히 택배기사들 몫이다. 김씨는 “물량이 많아 바쁠 때는 여전히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분류작업은 건당 수수료를 받는 택배기사에게는 무임금 노동이자 4~5시간씩 걸리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점에서 과로사의 주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지난 1월 정부, 여당, 택배사, 택배노조, 소비자단체가 참여한 사회적 합의기구는 1차 합의에서 택배기사의 기본 작업범위를 ‘택배의 집화와 배송’으로 한정했다. 분류작업은 택배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났다. 택배기사들은 분류 작업이 여전히 자신들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8일 2차 사회적 합의를 앞두고 전국택배노조원 6500여명은 택배사에 1차 합의 준수를 요구하는 의미에서 오는 7일부터 ‘오전 9시 출근 11시 배송 출발’ 단체행동에 돌입한다. 9시에 출근해 사측에서 개인별 분류를 해둔 물량만 받아서 배송하겠다는 것이다.

3일 오전 김포의 한 CJ대한통운 터미널에서 택배기사들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택배기사들이 입은 조끼 뒷면에는 ‘분류작업 택배사가 책임지고 즉각 시행하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박채영 기자

3일 오전 김포의 한 CJ대한통운 터미널에서 택배기사들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택배기사들이 입은 조끼 뒷면에는 ‘분류작업 택배사가 책임지고 즉각 시행하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박채영 기자

■“택배기사 84.7% 여전히 분류작업 수행”

3일 오전 9시30분 김포의 또 다른 CJ대한통운 터미널에도 택배기사들이 한창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전 6시30분 출근해 오전 9시까지 분류작업을 한 A조는 이미 1차 배송 물량을 싣고 나가고 B조가 11시30분까지 분류작업을 하는 시간이다.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레일 위에서 손바닥만 한 송장에 적힌 주소를 보고 물품을 분류하는 노동자들이 입은 조끼 등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분류작업 택배사가 책임지고 즉각 시행하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이 터미널에는 1차 합의 이후 택배기사 11명에 분류도우미 2명이 배치됐다. 하지만 분류도우미의 근무시간이 1명은 오전 6시30분~낮 12시, 다른 1명은 오전 9시~오후 2시다. 한창 분류작업을 해야 할 6시30분부터 오전 9시까지는 손이 부족하다보니 택배기사들도 분류작업을 같이 한다. 분류작업이 늦어지면 배송이 늦어지고 배송이 늦어지면 퇴근이 더 늦어지기 때문이다.

B조 근무를 한 택배기사 권지훈씨(38)도 오전 9시부터 11시30분까지 분류작업을 했다. 그나마 이날은 시간이 짧은 편이다. A조는 오전 6시30분부터 9시까지 분류작업을 하고 1차 배송을 마친 후 11시30분쯤 터미널로 돌아와 물량이 끝날 때까지 분류작업을 더 해야 한다. A·B조 근무는 일주일마다 교대한다. A조 근무일에는 분류작업만 해도 벌써 지친다. 권씨는 “택배사에서는 1차 합의 이후 각 택배분류 도우미를 채용하기 위한 지원금을 영업소에 보내주고 있다고 하는데, 정작 각 영업소에서는 분류도우미가 꼭 필요한 시간에는 없다”며 “분류도우미가 일을 더 하고 싶어해도 영업소에서 안 시켜준다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택배노조가 지난 2∼3일 전국 택배노동자 11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4.7%(1005명)가 여전히 택배 분류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별도 인력이 전혀 투입되지 않았다고 한 경우도 30.2%(304명)였다.

집화한 물건을 대형 간선트럭에 싣는 상차는 택배기사의 업무가 아니지만 택배기사의 퇴근 시간을 더 늦어지게 한다. 공장 등에 들러 배송할 물건을 받아오는 것을 집화라고 하는데, 택배기사가 집화해온 물건을 간선트럭에 싣는 상차는 도급사의 역할이다. 권씨는 “배송할 물건을 받아 터미널에 가져다 놓는 것으로 택배기사의 집화 업무는 끝인데, 상차를 기다리다 보면 대기시간만 2~3시간이 걸려 귀가가 늦어진다”고 말했다.

3일 오후 김포의 한 CJ대한통운 터미널에서 택배트럭들이 집화한 물건을 상차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있다. 박채영 기자

3일 오후 김포의 한 CJ대한통운 터미널에서 택배트럭들이 집화한 물건을 상차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있다. 박채영 기자

■일손 부족해 가족 동원하기도

일손이 부족하다보니 가족을 동원하거나 택배기사가 개인적으로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하는 일도 계속되고 있다. 권씨와 같은 터미널에서 일하는 강모씨는 부부가 같이 일한다. A조 근무를 하는 날 강씨는 오전 6시30분에 출근해 분류작업을 하고 오전 9시에 1차로 배송을 나간다. 1차 물량을 배송하는데 2시간쯤 걸린다. 오전 11시쯤 터미널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 들러 아내를 태워온다. 터미널에 돌아오면 강씨는 그가 1차 배송을 나간 사이 분류도우미가 분류해둔 택배를 트럭에 싣고 바로 2차 배송을 나간다. 아내는 터미널에 남아 못다한 분류작업을 한다. 물론 무임금 노동이다.

2시간가량 2차 배송을 마치고 터미널로 돌아와 아내가 분류해둔 택배를 모두 싣고 3차 배송을 나간다. 3차 배송까지 모두 끝내고 거래처에 들러 배송할 물건을 받아오는 집화까지 끝나면 오후 7~8시다. 물량이 적어 조금 일찍 끝나는 월요일을 빼면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거의 매일 12~13시간을 일한다. 아내와 둘이 일하던 강씨는 지난해 추석 이후로 “이러다가 뉴스에 나온 것처럼 우리도 과로사하겠다” 싶어 일당을 주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채용해 이제는 강씨와 아내, 아르바이트 직원 3명이 함께 일한다.

택배기사 과로사 기사에 달리는 “힘들면 물량을 줄이면 되지 않느냐” “택배기사 생각보다 고액연봉” 같은 댓글에도 할 말이 있다. 성수기에 수익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매달 아르바이트 직원 급여, 기름 값, 정비 비용 등 고정비용만 200만~300만원이 나가고 파손 혹은 분실된 택배도 택배기사가 배상해야 한다. 추석부터 연말연초까지 이어지는 성수기가 지나면 여름부터 이어지는 비수기에는 수입이 30~40% 줄어드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강씨는 “택배기사들이 많이 번다고 하지만 노동시간이 길고 고정비용이 많이 나간다”며 “성수기 때 물량이 많다고 배송 구역을 줄여버리면 비수기 때는 고정비용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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