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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물질 줄줄 새는데 '손으로 막고, 대피 안시키고'···LG디스플레이 산재 사고 전말읽음

이혜리 기자
지난 5월16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일하다 죽지 않게’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준헌기자

지난 5월16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일하다 죽지 않게’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준헌기자

지난 1월 독성 화학물질이 누출돼 협력업체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은 경기도 파주 LG디스플레이 공장 사고의 배경에 원청인 LG디스플레이의 총체적 안전 관리 부실이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누출된 독성 물질을 하청업체 직원들이 손으로 막고 있는 상황이 10여분 지속됐음에도 LG디스플레이 측은 안전조치나 사고 후 응급조치 모두 제대로 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6일 경향신문이 배진교 정의당 의원을 통해 확보한 ‘재해조사 의견서’에는 이같은 내용이 담겼다. 노동자가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중대재해 사고는 노동청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조사를 통해 재해조사 의견서를 작성한다. LG디스플레이 공장 사고에 대한 의견서는 고용노동부 고양노동지청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합동조사 결과와 사업장 관계자의 면담·진술 내용, 현장 확인 내용을 근거로 작성됐다. 35쪽 분량의 의견서엔 ‘원청’이라는 단어가 26번 등장했다.

재해조사 의견서에 따르면, 사고는 애초 담당이 아닌 업체가 공사를 맡으면서부터 시작됐다. 현상 공정용 탱크를 바꿔야 하는데 신규 탱크의 크기가 커서 기존에 사용하던 수산화테트라 메틸암모늄(TMAH) 배관 길이를 줄이고 방향을 위로 올리는 등 배관 수정작업이 필요했다. TMAH는 급성 독성물질이다. 그런데 원래 이 업무 담당인 A사가 사전 협의된 게 없어 바로 공사하기 어렵다고 했고, 이에 업무는 경험이 없는 B사로 넘어갔다. ‘비용이 발생되면 나중에 처리를 해줄테니 작업을 해달라’고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안전작업허가 제도는 유명무실했다. 구체적인 작업계획서가 필요한 일반작업허가서 대신 사고가 우려돼 즉시 조치가 필요한 때에 한해 제한적으로 쓰는 긴급작업허가서로 공사가 진행됐다. 허가서의 작업 내용은 실제와 달랐고, 작업 전 작성하는 일일점검표에는 ‘배관 내 잔류물 제거 양호’ 등 형식적인 내용이 적혔다. B사는 LG디스플레이로부터 작업 기간은 2개월에서 45일로 단축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배관 수정작업을 위해서는 밸브를 잠그고, 배관에 남아있는 TMAH를 완전히 제거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사고 순간을 목격한 현장 작업자에 의하면, 신규 탱크에 연결될 배관 라인 구성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른 작업자가 메인배관 연결부위 너트를 풀었고, 그 순간 화학물질이 분출되면서 배관이 빠져버렸다. 작업자 3명이 배관을 다시 끼우려고 시도하다 화학물질을 덮어쓴 뒤 씻는 과정에서 쓰러졌다.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발생한 지난 1월13일 오후 경기 파주시 LG디스플레이 공장 내 차량이 분주하게 현장을 오가고 있다. 연합뉴스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발생한 지난 1월13일 오후 경기 파주시 LG디스플레이 공장 내 차량이 분주하게 현장을 오가고 있다. 연합뉴스

LG디스플레이 직원들이 누출 차단을 위해 어떤 밸브를 잠가야 하는지 찾지 못해 허둥지둥하며 시간이 지체됐다. TMAH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이곳저곳 밸브를 잠갔고, 이 과정에서 LG디스플레이 직원들은 TMAH에 접촉된 작업자들을 즉시 대피시키지도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0여분을 작업자들이 화학물질이 나오는 배관 틈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TMAH가 위험한 물질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작업자들은 조사에서 진술했다.

한 부상자는 “누출된 배관을 재연결하다가 너무 많은 약액이 묻어서 제가 스스로 샤워시설을 찾으러 갔기 때문에 LG디스플레이 측 직원이 대피하라든가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며 “냄새도 안나고 색깔도 없어서 (누출액이) 위험한 물질인지 몰랐다”고 조사에서 진술했다. 다른 부상자는 “누출된 물질이 위험한 물질인지 몰랐기 때문에 사고 당시 손으로 막고 있었다”며 “만약에 위험한 물질이었다면 LG디스플레이 담당자들이 바로 사고 장소에서 나가도록 조치했어야 했는데 비닐봉지를 가져다주고 하니까 저희가 막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사고 조사자들은 의견서에서 “원청(LG디스플레이) 직원들은 협력업체 작업자들의 즉시 대피나 응급조치보다 누락된 TMAH 공급밸브를 닫는데 급급했다”며 “누락 밸브 위치도 몰라 약 30분 정도 누출되는 등 신속한 누출 차단도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현장 작업은 물론 안전조치까지 협력업체 주도로 이뤄진 게 문제로 지적됐다. 조사자들은 “원청 직원들은 생산 장비는 장비를 공급한 협력업체가 전문이고, 장비 관련 변경 작업도 협력업체에서 알아서 작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며 “잠금장치가 설치된 밸브의 배관 해체는 원청에서 잠금장치를 먼저 해체한 후 이뤄져야 하며, 잠금장치를 해체한 후에 밸브를 조금 열어 배관 내부에 TMAH가 공급되고 있는지 확인했더라면 이번과 같은 다량 누출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조사자들은 “주관부서(LG디스플레이)에서는 사고 당일까지 배관 내부 TMAH를 제거할 방법을 찾던 중이었으며 협력업체에게 TMAH 배관 해체는 아직 지시하지 않았고 협력업체에서 배관을 해체할 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그러나 배관 수정작업을 계속 진행하려던 정황이 있다”고 했다.

정호영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지난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출석해 “위험작업들을 내재화해서 직접 수행하는 방안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LG디스플레이는 전 사업장 정밀 안전진단, 주요 위험작업의 내재화, 안전 환경 전문인력 육성·협력사 지원 강화, 안전조직의 권한과 역량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4대 안전관리 혁신 대책을 발표했다. LG디스플레이 관계자는 “(파주 공장 사고 관련해) 관계기관 조사에 성실히 응했다”며 “원청으로서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은 책임을 진다는 입장이고, 여러가지 개선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배 의원은 “계약에서부터 안전관리까지 원청의 총체적 부실로 중대재해가 일어났음이 밝혀진 만큼 중대재해법에 준한 경영진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LG디스플레이의 위험업무 직영화 등 진행사항을 국회 차원에서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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