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화·안전모 씌운 후 사진 찍고 서명···안전교육 끝”

이혜리 기자

KT 외선정비 노동자는 왜 목숨을 잃어야 했나

노동자 38명이 숨진 이천 물류창고 건설 현장 화재가 발생한 지 1년을 앞둔 지난 4월27일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 산업재해 사망 시민분향소를 마련한 모습. 권도현 기자

노동자 38명이 숨진 이천 물류창고 건설 현장 화재가 발생한 지 1년을 앞둔 지난 4월27일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 산업재해 사망 시민분향소를 마련한 모습. 권도현 기자

집에서 KT가 제공하는 인터넷을 쓰고 싶으면 갑자기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KT 지점에서 시작하는 광케이블이 땅 속이나 전봇대를 통해 그 집까지 닿아야 한다. 광케이블을 땅 속에 직접 파묻고 전봇대로 공중에서 연결하는 것은 사람이다. 집 근처에 전봇대가 없으면 전봇대를 세워야 할 때도 있다. 지난 14일 경북 포항에서 광케이블이 둘둘 말린 417㎏짜리 드럼에 깔려 사망한 김모씨(57)는 이런 일을 했던 KT의 외선정비공 노동자였다.

지난 17일 대구의 한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씨 빈소에서 만난 동료들은 김씨가 사망한 현장에 안전 조치가 미흡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KT의 외선정비 일을 하지만, 소속은 대종통신건설이라는 중소기업이다. 노동자들이 아침을 먹고 사무실에 올라가면 현장소장이 그날 작업할 도면을 나눠주고, 트럭에 자재를 실으라고 지시한다. 사고 당일도 크레인으로 케이블을 트럭에 옮겨싣는 과정이었다. 통상 다른 사업장에서는 케이블에 쇠로 된 고리를 고정시켜 크레인이 잡아올리지만 이 사업장에선 쇠고리가 아니라 밧줄로 연결했다. 밧줄이 풀리면서 김씨가 케이블에 깔렸다. 김씨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안전관리자나 신호수는 없었고, 노동자들은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크레인 뒤쪽에서 녹이 슬어 보이는 쇠고리가 발견됐다. 사고 당시 김씨와 함께 근무했던 A씨는 “케이블을 들 수 있는 와이어나, 고리를 본 적이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며 “자주 쓰는 연장은 잘 보이게 놔둬야 될 것 아니냐”고 했다. 대종통신건설은 9명이 2개 팀으로 일했는데 크레인은 하나라, 한 팀이 크레인을 사용하면 다른 팀은 크레인 없이 일을 하는 식이었다고 했다. 그날 끝내야 하는 업무량은 정해져있지만 장비와 사람은 부족했고, 작업 방법에 대한 회사 측의 명확한 지침이 노동자들에게 전달되거나 관리되지 않았다.

평소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야적장에 서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그리고는 어쩌다 한 번씩 사인하러 사무실에 올라오라고 합니다. 올라가면 A4용지에 사인하라고 하고, 내 이름이 기재된 곳에 사인하면 끝입니다. 그게 끝입니다. 그렇게 앉아있는 모습도 사진을 찍더라고요.” 안전관리자로 지정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같은 통신건설 일을 하면서 김씨를 알고 지낸 B씨도 “현장에 안전관리자는 없고, 작업 매뉴얼이나 안전교육도 없다”며 “안전하게 안전모 쓰고 하라는 일반적인 이야기 뿐”이라고 했다. 김용균씨와 이선호씨 등 노동자의 산업재해 사망이 큰 사회적 논란이 되고, 중대재해처벌법까지 만들어졌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제대로 된 안전교육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사업장은 50인 미만이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3년간 적용이 제외되는 곳에 해당한다.

지난 14일 경북 포항에서 KT 외선정비공 노동자가 사망한 현장의 CC(폐쇄회로)TV 모습.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제공.

지난 14일 경북 포항에서 KT 외선정비공 노동자가 사망한 현장의 CC(폐쇄회로)TV 모습.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제공.

노조는 김모씨가 사망한 현장에서는 케이블을 밧줄로 매달았지만(왼쪽), 통상의 다른 현장에서는 쇠고리로 고정했다(오른쪽)며 대종통신건설의 안전조치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제공

노조는 김모씨가 사망한 현장에서는 케이블을 밧줄로 매달았지만(왼쪽), 통상의 다른 현장에서는 쇠고리로 고정했다(오른쪽)며 대종통신건설의 안전조치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제공

B씨는 케이블에 깔려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 앞이 캄캄하고 멍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구나, 한 5년 전에도 (주변에서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는데 또 일어났구나’ 싶었어요. 확실히 바로잡지 않으면 또 생기고, 또 생길 거예요.” B씨는 “항상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땅 속에는 가스관이나 전기 등도 매설돼있는데 별다른 장비 없이 사람이 삽으로 땅을 파고 케이블을 넣는다”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A씨도 “장비가 부족해 전봇대도 사람이 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전봇대가 노후돼 흔들리는 경우도 있지만 잡아줄 사람도 없다”며 “사람을 더 주거나 지원을 더 해줘야 되지만 그런 것은 없고 작업량은 빡빡하게 일을 해야 채울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대종통신건설은 물론이고, ‘위험의 외주화’가 사고의 근본 원인이라며 KT가 원청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KT는 ‘공사 발주’를 한 것이기 때문에 안전 관리 책임이 KT가 아니라 대종통신건설에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발주는 전체 공사를 특정 업체에 맡겨버리는 것이라 해당 사업장에서 산업재해가 나도 책임이 없다는 취지다.

KT 관계자는 “대종통신건설은 KT에서 발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둘은 대등한 관계이고 하나하나 KT가 지시하는 관계가 아니다”라며 “대종통신건설이 안전 관리를 포함해 모든 것을 알아서 하고 안전관리 비용이 발생했을 때 KT에 계상을 요청하는 형태인데, 요청한 안전관리 비용은 다 지급했다”고 설명했다. 또 KT는 A씨가 사망한 장소가 KT 소유이긴 하지만 대종통신건설에 임대해준 곳이라 KT는 무관하다고 했다.

노조는 김씨 사망 전에 안전관리를 요구했지만 대종통신건설이 ‘KT가 비용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밝혀 말이 엇갈린다. 서동훈 공공운수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KT가 발주처인데 외선 건설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심이 없다”며 “정해진 돈만 주고 (하청)업체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다보니 업체는 금액 안에서만 일을 끝내면 되고 (안전관리 등의) 고민을 못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발주처도 위험요인 감소방안을 담은 대장을 작성하는 등 일정한 산업재해 예방조치를 하도록 규정한다. 다만 공사금액이 50억원 이상인 때만 적용된다. 중대재해처벌법 원안에는 발주한 사업장에서의 위험도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방지하도록 돼있었지만, 제정 과정에서 삭제됐다. 발주처가 시공처 선정 때 안전역량을 확인하도록 하는 등 발주처의 안전관리 책임을 강화하는 건설안전특별법은 국회에 발의만 돼있는 상태다. 공공기관만 기획재정부 지침에 따라 공사 발주 현장도 안전관리 대상 시설에 포함시켜 사망사고 발생시 경영평가에서 감점을 받는 식으로 제재를 받고 있다.

원정훈 충북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민간에서 개인들이 하는 소규모 발주 공사에 대해 모두 안전 관리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지만, KT처럼 통신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발주한 공사에 대해서까지 책임의 예외로 둬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며 “사각지대로 놓여있다”고 했다.

지난해 4월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산재사망 대책마련 공동 캠페인단이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해 4월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산재사망 대책마련 공동 캠페인단이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김씨의 아내 C씨는 남편이 험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스스로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어느 주말 저녁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했다는 뉴스를 남편과 함께 보면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고 했다. ‘저렇게 일하다 죽는 사람이 많은데, 사람이 죽고 나서야 대책을 내놓느냐’는 C씨의 말에 남편은 ‘회사에서 돈 아끼려다가 그렇게 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C씨는 뉴스를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했던 일인데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현장의 안전관리를 잘 했으면 이런 인명사고는 없었잖아요. 사고가 나니까 이제와서 회사 측에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면 또 안이하게 갈 수도 있겠죠. 우리 아저씨가 이렇게 사망하긴 했지만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는 게 제 소망이예요. 노동자들이 사소하게 다칠 수는 있겠지만 아까운 생명을 잃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 19일까지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214명이다.

김씨 장례는 19일 치러졌다. 노조와 대종통신건설 측은 사고 원인이 회사의 안전관리 부족에 있다고 확인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안전관리자 배치, 크레인 작업 시 반경 내에 노동자가 진입하지 않도록 펜스와 신호수 배치, 작업안전공구의 주기적 점검 등이 합의에 포함됐다. 대종통신건설 측은 기자 연락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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