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 정규직은 불법 파견 소송 포기” 노동자에 내민 현대제철

이혜리 기자
비정규직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비정규직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자회사를 통해 사내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현대제철이 자회사 인력 채용 과정에서 ‘불법 파견에 관해 소송 등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확약서를 쓰도록 노동자에 제시하고 있다. 노조 쪽에선 열악한 지위의 노동자에게 권리 포기를 요구해 현대제철이 법적 책임을 피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현대제철은 확약서 작성을 강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했다.

12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현대제철이 사내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 현대ITC는 최근 신규 채용 노동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면서 ‘부제소 확약서’에 서명할 것을 제시했다.

확약서에는 “현재까지 현대제철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청구 또는 동종·유사한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한다”며 “현대제철을 상대로 현대제철과 협력업체 사이의 법률관계가 적법 도급관계가 아님을 전제로 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쓰여있다.

또 “협력업체에 근무했던 기간의 근로관계와 관련해 현대제철을 상대로 임금·상여금 등 명목을 불문하고 금품을 청구하는 소송을 비롯해 일체의 민사·형사·행정상 및 기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기존 협력업체와의 근로계약, 취업규칙, 단체협약, 임금협약 기타 노동관행 등을 근거로 현대제철이나 현대ITC를 상대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문구도 있다.

“자회사 정규직은 불법 파견 소송 포기” 노동자에 내민 현대제철

현대제철은 확약서 작성이 강요가 아닌, 노동자들 의사에 맡겨진 것이라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확약서는) 채용할 때부터 공개됐던 사항이고, 지원한 분들은 작성한다고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자회사에 입사했는데도 과거 협력업체에 있었을 때의 불법 파견을 문제삼아 소송을 하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에 확인을 받는 차원”이라고 했다. 법원에 소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당사자 사이의 합의, 즉 ‘부제소 합의’는 법원에서는 유효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조 쪽에선 정규직 채용 권한을 갖고 있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권리를 포기하는 확약서를 작성하도록 한 것은 부당하고, 현대제철의 법적 책임 회피 의도라는 비판이 나왔다. 현대제철 순천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제철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에서 법원은 1·2심 모두 불법 파견을 인정하고 직접 고용하라고 판단,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당진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낸 소송은 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소송 결과 노동자들이 승소하면 현대제철이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하는데,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 전환을 계기로 노동자들에게 소송하지 않을 것을 확인받음으로써 법적 책임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노조는 자회사가 ‘덩치만 커진 하청업체’일 뿐이라며 직접 고용을 요구해왔다.

고용노동부도 근로감독 끝에 노동자들을 직접 채용하라고 시정지시했고, 현대제철이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자 120억여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를 누가 자의로 작성하겠느냐”며 “일종의 전략적 봉쇄소송(비판이나 반대 여론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제기하는 소송)처럼, 취업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취업 관련 권한을 갖고 있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확약서는 대등한 관계에서 작성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김기덕 변호사는 “강요는 아니겠지만 노동자가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 전환을 보장받으려면 회사가 바라는대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합의 해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노동자로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ITC는 확약서와 별도로 노동자에게 ‘시정지시 이행 확인서’도 작성하도록 제시했다. “근로자파견관계 인정 여부와는 무관하게, 현대제철에 직접 고용됨에 갈음해 현재의 소속 회사에서 계속 근로하거나 현대제철이 출자해 설립한 현대ITC에 입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파견법은 2년을 초과해 계속 파견노동자를 사용하는 경우 등에 사용자가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도록 하면서도, 노동자가 ‘명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때는 예외로 하는데 이 규정을 활용해 직접 고용을 반대하는 노동자의 의사 표시를 확보해두는 취지다. 이강근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정부가) 불법을 시정하라고 했는데 불법을 해결하지 않고 확인서를 통해 면책을 받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순천공장에서 최초 (불법 파견이) 문제된 시점과 지금은 다르고, 내부 시스템이나 관리방식이 많이 바뀌었다”며 법원에서 순천공장 불법 파견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당진공장 등 다른 사업장의 불법 파견 여부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현대제철은 사내하청업체들을 대상으로 이달 31일부로 도급계약 및 고용관계를 종료한다고 통보한 상태다. 현대제철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자회사 채용에 지원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실직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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