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와 대리점 갈등에 가려진 '진짜 갑' 택배회사읽음

이혜리 기자

지난달 30일 경기도 김포의 택배 대리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택배업계는 격랑에 휩싸였다. 해당 대리점주가 노조원들 때문에 괴로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고, 민주노총 택배노조는 일부 노조원이 조롱과 비아냥 표현을 단체대화방에 올린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논란은 가라앉기는커녕 증폭됐다. 대리점연합 쪽은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며 공격하고, 택배노조는 반박하는 일이 반복되며 감정싸움으로 비화된 양상이다. 13일에도 대리점연합은 택배기사 급여 액수를 공개하며 택배노조의 수수료 인상 요구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택배노조는 ‘노조원 갑질보다 대리점 갑질이 더 심각하다’는 택배기사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택배기사들의 과로사로 시작된 택배산업의 노동환경 개선 목소리는 왜 대리점주의 극단적 선택이라는 비극을 마주하게 됐을까. 경향신문이 대리점주·택배기사·전문가 등을 취재한 결과 이 같은 갈등의 이면에는 갑인 택배사와 을인 대리점주, 병인 택배기사로 이뤄진 택배산업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특수고용 노동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 지위의 택배기사들이 노조를 통해 뭉치고 교섭을 요구했지만 택배사가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는 사이 일선 현장에서는 대리점주와 택배기사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잠재돼있던 게 터졌다”고 했다.

지난 1일 경기도 김포시 한 택배업체 터미널에 마련된 40대 택배대리점주 A씨의 분향소에 영정이 놓여 있다. A씨는 노조를 원망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지난달 30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경기도 김포시 한 택배업체 터미널에 마련된 40대 택배대리점주 A씨의 분향소에 영정이 놓여 있다. A씨는 노조를 원망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지난달 30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연합뉴스

■택배 노동환경 개선 위해 출범한 노조

택배기사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오랫동안 문제가 돼왔다. 코로나19로 인해 물량이 늘어난 지난해엔 더 심각했다. 택배기사 십수명이 연달아 쓰러져 사망했다. 일례로 지난해 12월 30대의 건강하던 남성 A씨는 택배기사 일을 한 지 6개월 후 사망했다. 사망 전 일주일간 그가 일을 한 시간은 76시간55분. 3개월간으로 따져도 과로사 기준인 일주일 60시간을 넘겼다. 택배기사들은 선풍기도, 제대로 된 휴게실·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공짜 노동’인 분류업무를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배기사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유로 노동3권에서 배제돼 있었다. 형식적으로 보면 택배사는 대리점주와 화물 운송에 관한 계약을 맺고, 대리점주는 택배기사와 계약을 맺는다. 특수고용노동자는 타인의 사업을 위해 직접 노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얻은 수입으로 생활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자와 유사하지만, 계약 형태 때문에 노동자로 보호받지 못했다.

2017년 1월 택배노조 출범은 택배기사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특수고용노동자에게도 노동3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택배사·대리점으로부터 업무 내용·수행과 관련된 지휘·감독을 받고 지정된 구역에서 지정된 업무를 하는 점을 감안해 택배기사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택배노조에 설립신고증을 교부했다. 택배노조는 최근 7000명까지 조합원 수가 늘었다.

정식 노조가 된 택배노조는 택배사와 대리점주들에게 교섭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불평등한 수수료 체계와 업무 매뉴얼·터미널 시설 개선, 분류작업 조정, 고용 안정, 안전사고 방지 등이 쟁점이었다. 그러나 업계 1위 CJ대한통운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대리점주와 택배기사 간에 해결할 일이라고 넘겼다. 법적 다툼으로 이어졌고 CJ대한통운은 현재까지도 이 사안에 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대리점주는 노조의 교섭 요구를 무작정 외면하기 어려웠다. 현장에서 노조를 맞닥뜨리고 대응해야 하는 사람은 대리점주였다.

[택배업계는 지금 乙들의 전쟁]택배기사와 대리점 갈등에 가려진 '진짜 갑' 택배회사

■택배사와 기사 중간에 낀 ‘대리점주’

정작 대리점주는 택배사와의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다. 택배사는 입찰을 통해 대리점주를 선정하고, 2년마다 재계약한다. 대리점주는 택배기사들을 관리하면서 택배사의 물류 체계를 가동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특별히 인력 운영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직원이 10~20명으로 영세하고, 대리점주가 기사 역할까지 병행하기도 한다. 근래엔 나아졌다지만 택배사가 당일배송 등 고객관리(CS) 지표를 갖고 대리점주를 압박하기도 했다. 재계약의 키를 택배사가 쥐고 있기 때문에 대리점주는 택배사 눈치를 봐야 한다. ‘해고는 못해도 재계약은 안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택배사는 대리점주에게 한정된 수수료를 주고, 그 수수료를 대리점주와 택배기사가 어떻게 나눠 가질지는 알아서 결정하게 맡긴다. 대리점주가 많이 가져가면 택배기사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수수료 분배에 일관된 기준이 없다보니 대리점주 성향에 따라 택배기사의 급여가 달라졌다. 어떻게 수수료가 분배됐는지 구체적 내용을 대리점주가 택배기사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불신은 계속 쌓였다.

택배노조가 생기고 택배기사들이 집단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면서 대리점주는 택배사와 택배기사 중간에 낀 처지가 됐다. 일부 대리점주들은 이에 대응할 여력이 없거나, 노조 요구를 수용하면 자신이 손해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노조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힘이 커진 ‘병’들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조정해본 경험이나 능력이 없는 대리점주들이 있었다. 노조 가입을 이유로 해고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주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택배사는 관리 리스크를 대리점주에게 떠넘겼고, 대리점주는 관리 역량과 정보가 없다”며 “그렇다보니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불신이 많이 쌓이고 합리적으로 조정이 이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을(대리점주)과 병(택배기사) 사이에 많은 갈등 요소들이 잠재해 있었지만, 그동안에는 힘이 센 대리점주가 눌러왔다”면서 “하지만 택배노조도 커지면서 힘이 세졌고, 둘이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한 대리점주는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대리점주들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리점을 많이 운영했지만 노조가 생긴 뒤엔 자기 마음대로 운영을 못하니까 힘들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며 “대리점주는 노조에 밀리고, 회사(택배사)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고 했다.

택배연대노조가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CJ대한통운과 계약해 일을 하던 택배노동자가 석달 사이에 2명이 죽었다며 과로사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택배연대노조가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CJ대한통운과 계약해 일을 하던 택배노동자가 석달 사이에 2명이 죽었다며 과로사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대리점주·노조 갈등에도 쏙 빠진 택배사

택배기사의 노동환경 개선과 관련해 대리점주 권한의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택배업계 한 관계자는 “대리점주와 노조가 할 수 있는 건 수수료와 배송구역 조정 정도밖에 없다”며 “그 외에는 택배사 영역”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물건을 주고 배송시키는 곳은 택배사지만, 본인들이 택배기사를 직접 고용하지 않았다면서 모른다고 한다”며 “대리점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풀지 대리점과 이야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냥 대리점에 떠넘기니까 문제가 커진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택배사가 대리점을 총알받이로 내세운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용자와 노조 간에는 원래 이해관계 다툼이 있는데, (최근 대리점주·택배기사 간 갈등으로) 그 이해관계 다툼을 조율할 수 없음이 드러나는 것”이라며 “정부나 택배사 등 힘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고 나머지들이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택배노조는 노조가 과도하게 대리점주를 괴롭힌다는 일각의 주장이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리점주와 노조 간 갈등도 과장됐다고 했다. 김태완 택배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대리점에 비리가 있거나 대리점주가 배송구역을 임의로 조정하고 노조원을 해고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대리점과 싸우지 않으려 한다”며 “지불능력이 없는 대리점주와 싸워봐야 답이 없기 때문에, 택배사인 CJ대한통운을 상대로 ‘진짜 사장 나와라’ ‘분류작업 개선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왔다”고 했다. 택배노조에 따르면 CJ대한통운의 전체 2000여개 대리점 중 노조가 있는 곳은 150개 정도다.

다만 쟁의행위의 직접적 영향은 대리점주가 받게 된다. 김종철 CJ대한통운 대리점연합회장은 “택배기사의 과로사를 방지하기 위해 택배사와 협의해 분류작업을 빼주기로 했지만, 택배기사들은 내로남불”이라며 “대리점이나 택배사는 택배기사들을 위해 양보하는데 태업 등 본인들만 편하고 좋은 것을 하려 한다”고 했다. 최시영 아주대 공학대학원 물류SCM학과 교수는 “노조가 택배기사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이외 사항을 요구한다면 무리라고 생각한다”며 “노조원들은 택배노조라는 상위 단체 지휘를 받지만, 대리점주는 단독으로 하기 때문에 동등하게 협상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했다.

결국 키를 쥐고 있는 택배업계가 책임있게 나서지 않는 한 이러한 갈등 양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윤영삼 부경대 경영학부 교수는 “택배기사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택배사와 대리점주가 각각 해야할 일이 있을텐데, 문제는 택배사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대리점주와 택배기사의 갈등 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라며 “택배기사들의 불만이 대리점주에게 쏠리다시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대리점주는 객관적으로 보면 힘도, 자율성도 없지만 때로는 택배사 눈치를 봐서 자신들이 사용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며 “그렇다고 정말 사용자로서 책임질 수 있는 사용자인가 따져보면 아니다. 택배업계의 지배자는 택배사인데 10~20%의 권한을 대리점주가 갖고 있다고 대리점주가 사용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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