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교섭단체 인정 못 받는 노조…갈등만 있고 ‘대화’ 통로는 좁다읽음

이혜리·고희진 기자

협상 회피하는 택배사

지난해 10월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지난해 10월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노동조합은 있는데 사용자와 단체교섭은 못한다. 택배노조의 이야기다.

헌법은 근로자가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단결권·단체행동권과 함께 단체교섭권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사용자에게 노동조건 개선을 직접 요구하고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이다. ‘교섭을 못하는 노조는 무용지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단체교섭권은 중요한 노동3권 중 하나다. 하지만 2017년 택배노조가 설립된 후 2년 넘게 제대로 된 교섭 절차가 진행되지 못했다. 택배사와 대리점 측이 택배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섭을 둘러싼 법적 다툼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현장에선 대리점주와 택배노조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최근 김포 대리점주 사망 이후 분출됐다는 게 택배업계·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택배산업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택배사 CJ대한통운은 대리점주와 택배기사 간 갈등과 관련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다.

■교섭 못하는 상태서 쌓여온 갈등

위·수탁 계약 따른 책임 전가 급급
문제 풀 관계의 정립부터 ‘이견’
실질적으론 택배노조 역할 제한

택배사는 대리점주와, 대리점주는 택배기사와 화물운송에 관한 위·수탁 계약을 체결한다. 택배기사는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된다. 문제는 교섭이었다. 2017년 고용노동부는 택배기사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라고 보고 택배노조에 설립신고증을 교부했지만, 대리점 측은 택배기사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택배기사는 일반적인 노동자처럼 근로계약을 맺은 게 아니고 개인사업자라 교섭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대리점 측 주장이었다. 택배노조는 업계 1위인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 노동조건 결정에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는 ‘진짜 사장’이라고 보고 CJ대한통운에도 교섭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CJ대한통운은 자신들이 택배기사와 직접 계약을 맺지 않았다며 대리점주와 택배기사 간에 풀 일이라고 했다. 결국 법적 다툼으로 비화됐다.

택배노조는 형식적으로는 노조가 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노사가 교섭을 통해 협정을 맺고, 그 협정으로 당분간 평화상태를 유지하는 게 노사관계의 기본인데 택배업계는 이 같은 절차가 이뤄지지 않았다. 노조는 강경한 투쟁방침을 앞세우게 되고 갈등 수위만 점점 높아지는 구조가 됐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무조건 단체교섭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체교섭 의제가 어디까지인지 등이 모두 줄다리기 싸움”이라며 “문제를 원청(택배사)과 대리점, 택배노동자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푸는 관계가 아직도 정립이 안 돼 있다보니 택배기사가 가까운 적인 대리점과 부딪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대리점주에게 교섭 의무가 있다는 점은 그나마 최근 대리점주들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정리되고 있다. 2019년 11월 법원에서 대리점주가 교섭 대상이 맞다는 판결이 나온 뒤인 지난해부터 대리점주들과 택배노조가 교섭을 진행했다. CJ대한통운도 대리점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계약한 택배기사(70여명)와 벌이던 소송을 최근 취하했다. 남은 것은 CJ대한통운이 대리점주와 계약한, 즉 택배사와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는 택배기사의 교섭 대상이 되는지다. 가장 큰 불씨로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택배기사 인원으로 따지면 2만여명에 해당한다.

■중노위 “지배·개입 택배사가 교섭해야”

법원·중노위는 “택배사가 교섭을”
노동부는 “위법 아니면 자율 해결”
전문가들은 정부에 판단 촉구
“법 바꿔 사용자 정의 명확히 해야”

노동계에서는 지난 6월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가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의 원청 사용자로서 택배노조와 교섭할 의무가 있다고 한 판정을 주목한다. 이 판정을 토대로 CJ대한통운이 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노위는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더라도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지배·결정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면 노조법상 사용자로서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게 합당하다고 밝혔다. 중노위는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원청이 노동조건을 일정 부분 지배·결정 함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는 자신의 노동조건 등에 대해 단체교섭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고, 그 노동조건 등에 대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이 본질적으로 제약된다”고 했다.

택배노조가 내민 교섭 의제 중 서브터미널에서 택배기사의 배송상품 인수시간 단축, 서브터미널의 작업환경 개선 등은 CJ대한통운이 단독으로, 주 5일제 및 휴일·휴가 실시, 수수료 인상 등은 CJ대한통운과 대리점주가 함께 교섭해야 한다고 중노위는 판정했다. 유성욱 택배노조 CJ대한통운 본부장은 “대리점이 워낙 영세하다보니 교섭을 하더라도 택배노조 요구안은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게 대리점들의 주된 입장이고, (교섭 진행은 했지만) 아직까지도 타결된 곳은 없다”며 “원청(CJ대한통운)이 실질적 지휘·감독권을 갖고 있는 한 원청과 교섭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CJ대한통운은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중노위 판정은 택배 관련 사건이기는 하지만 하청 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는 취지로 해석한다면 전체 산업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경영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CJ대한통운의 무대응이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온다. CJ대한통운은 대리점주-택배기사 노사관계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대리점주와의 계약내용인 ‘책임 배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지적할 수 있는 구조다. 노조 쟁의행위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대리점주가 손해를 스스로 감내하는 상황이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택배사가 (택배 갈등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고 법원과 중노위 판단에 따라 적극적으로 같이 해결해야 한다”며 “현재(갈등 구도)처럼 가는 게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고,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게 택배사가 택배업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다만 CJ대한통운의 무대응에 관해 김종철 CJ대한통운 대리점연합회 회장은 “노조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그 싸움에 원청이 끌려들어가는 것”이라며 “CJ대한통운은 대기업인데, 노조가 물타기하는 것에 끌려가서 진흙탕 싸움을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이어 “(CJ대한통운에 문제가 있었다면 사망한 김포 대리점주가) 죽음을 택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뭐가 두려워서 원청에 대한 불만을 유서에 적지 않았겠냐”며 “대리점주와 교섭을 하면 되고 노조원들의 욕설, 폭행, 폭언은 교섭과는 관련 없다”고 했다.

지난 6월2일 오후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택배노조 관계자 등이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2일 오후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택배노조 관계자 등이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3자 지속협의·정부 역할 필요” 의견도

전문가들은 택배사-대리점-택배기사의 3자 간 협상 테이블을 통해 택배업계 쟁점에 관해 지속적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늘 갈등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택배업계의 갈등을 중재하는 정부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주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산업구조의 전환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낸 것처럼 행위주체들 간에 수용가능한 합의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며 “사회적 합의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택배산업의 발전 전망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문제 해결이 이뤄져야 된다”고 했다. 최시영 아주대 공학대학원 물류SCM학과 교수는 “(현재의 갈등은) 택배노조를 법내노조로 인정해놓고 협상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폐해로, 정부 책임이 있다”며 “노조와 택배사 대표, 공익 대표 등이 참여해 (택배비 인상과 수수료 지급 등의) 큰 흐름을 조정해주는 식으로 제기되는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노동부는 대리점주와 택배기사 간 갈등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위법 사항이 발생한 게 아닌 이상 개입보다는 노사 간 자율적 해결을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위법 사항이나 갈등이 지나치게 심한 현장은 지방노동관서에서 관심 갖고 지도한다고 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택배사의 교섭 의무와 관련해서 “하청 노조가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적법하지 않다는 기존 정부 입장을 당장 바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애초에 특수고용노동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포괄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노동계에서는 근기법 2조의 근로자 정의 규정을 개정해 특수고용노동자도 근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김성희 교수는 “특수고용노동자의 근로자성 문제가 (택배 갈등의) 핵심이고, 특수고용노동자 문제의 또 다른 축인 플랫폼노동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데도 (정부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며 “전 국민 고용보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이는 외곽만 건드리고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노동조건에 관해 실질적 영향력이 있는 자까지 포함하도록 노조법의 사용자 정의 규정을 개정하거나, 원청의 단체교섭 의무를 명시하도록 입법 개선을 하라고 노동부에 권고하기도 했다.

택배산업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의 관계자는 “각자가 바라는 게 다른데도 힘들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며 이행하겠다고 한 것인데 노사 갈등이 생기다보니 합의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안타깝다”며 “(추가) 협의체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본사가 영업점에 (협의 내용을) 강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본사와 대리점 둘 다 함께 협의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지난 14일 대리점연합을 만나 대리점주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방안을 논의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을지로위원회 측은 이번 문제 역시 사회적 합의의 테이블에서 논의하려고 한다. 장시간 노동 개선 등 현장의 문화를 개선하는 과로사 문제와 달리, 택배사-대리점-택배기사 등으로 이어지는 계약관계에서 불거진 이번 문제를 사회적 합의로는 해결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을지로위원회 관계자는 “대리점 측의 의견을 들어보니 원청 및 노조 측과 대화와 협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도 있어보였다”며 “아직 노조가 만들어지고 오래되지 않아 현장에서도 대리점과 노조 양측 모두 규율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사회적 합의로 해결할 것은 하고 법적인 접근이 필요하면 이 역시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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