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침 있어도 늦어지는 산재 역학조사…그 사이 노동자는 죽고 없다

이혜리 기자
지난해 2월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열린 ‘죽음을 멈추는 2.22희망버스 출발 및 종합계획발표 기자회견’도중 참석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영정피켓을 들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해 2월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열린 ‘죽음을 멈추는 2.22희망버스 출발 및 종합계획발표 기자회견’도중 참석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영정피켓을 들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18세 때 삼성전자에 입사해 액정표시장치(LCD) 천안사업장(현 삼성디스플레이)에서 7년간 근무한 뒤 유방암을 진단받았던 A씨(39)가 지난달 19일 사망했다. A씨는 2019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했지만 사망 때까지 1년8개월이 지나도록 산재 승인 여부를 통지받지 못했다. 문제는 질병과 유해·위험요인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역학조사’였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정부는 이 역학조사에 소요되는 기간을 내부 지침으로 정해놨지만 상당수 사건을 이 지침을 어겨 처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20일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비례)을 통해 확보한 자료를 보면, 근로복지공단 산하 직업환경연구원은 업무상 질병 심의 및 자문 규정에 따라 의뢰받은 자문을 3개월 내에 처리해야 하지만 지난해 전체 처리사건(491건)의 56.6%(278건)는 규정을 위반해 처리됐다. 3개월은 사업주 등에게 추가 자료 요청, 동료 노동자 면담, 특별진찰 등 연구원 바깥에서 진행되는 절차를 뺀 기간이다.

구체적으로 사건 처리가 지연된 사유로는 ‘역학조사 지연에 따른 순차적 진행’이 70.5%(196건)로 가장 많았다. ‘문헌 고찰’은 20.5%(57건), ‘시료 채취’는 8.99%(25건)였다. 역학조사 때문에 처리가 지연된 사례 중에서는 최종 진단명이 암인 경우가 37.2%(73건)이었다.

직업환경연구원의 역학조사에 소요되는 평균 기간은 2019년 206.3일, 지난해 275.2일, 올해는 7월까지 376.4일로 지침을 훌쩍 뛰어넘었다. 석달 안에 끝나야 할 역학조사가 1년 넘게 이어지는 것이다. 지침을 위반해 처리한 사건 비율은 최근 5년여간 계속 악화돼왔다. 2017년 33.4%, 2018년 40.7%, 2019년 42.5%로 잇따라 비율이 증가했고, 올해는 8월까지 278건 중 70.8%인 197건이 지침 위반이었다.

희귀질환이나 새로 나타난 직업병 관련 역학조사를 하는 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역학조사평가위원회 운영지침은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역학조사를 의뢰받은 날로부터 6개월 내에 역학조사 결과를 심의·의결해야 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6개월 내에 역학조사를 완료해 근로복지공단에 회신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에 소요되는 평균 기간은 지난해 기준 438일이다. 노동인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가 처리 지연으로 파악한 삼성 관련 산재 신청만 11건이다. 이 중 4건은 2018년에 신청해 햇수로 3년이 넘었다.

2014년 8월18일 노동인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이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삼성 반도체 LCD 직업병 피해자 증언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4년 8월18일 노동인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이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삼성 반도체 LCD 직업병 피해자 증언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동계에서는 역학조사에 지나치게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것은 문제라고 보고, 이른바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역학조사를 생략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해왔다. 산재 처리가 늦어질수록 피해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A씨 남편은 반올림에 보낸 편지에서 “(산재 처리가 지연되는 사이) 아내의 병세는 계속 악화돼 죽음의 고비도 넘기며 가까스로 삶을 이어 가고 있지만, 그렇게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가계에 상당 부분이 자기의 병원비와 간병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상황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투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노동부는 역학조사를 생략해 산재 처리 기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도입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노동자에 대해서 역학조사 생략 기준을 만들었고, 포스코 사건에서는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산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에 산재로 인정된 노동자와 같은 직종에서 비슷한 시기 근무하는 등 생략 대상이 되기 위한 요건이 까다로워 생략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권동희 노무사는 “직업병이나 직업성 암에 대한 산재 판단은 법률적 판단이지만, 의학적 상관관계를 밝혀보겠다는 이유로 역학조사를 하고 있다”며 “(노동자가 근무했던) 현장이 없거나 연구된 사례도 없다보니 역학조사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렇게 의학적 원인을 밝히는 시스템이 산재에 대한 기본 법리와는 다르다”고 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역학조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경우에만 업무 관련성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2~3년에 걸쳐서 역학조사가 이뤄졌다고 해도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세부 공정이 아니라 대공정 단위로 크게 분류해서 동종 질환인 경우에는 산재로 인정하는 식으로 역학조사를 생략할 수 있지만 노동부 등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산재 인정에서 질병과 사망간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특히 2017년 대법원은 다발성 경화증을 앓은 삼성전자 LCD 노동자에게 산재를 인정하면서 노동자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 규명이 현재의 의학과 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인과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 전가하는 게 아니라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분담한다는 산재보험 제도의 목적을 고려한 것이다.

공단 쪽에선 A씨 사망이 안타깝다면서도 인력 부족과 장비 노후화 등으로 역학조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설명했다. 직업환경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인력이 없다”며 “일이 너무 힘드니까 전문 인력이 오려고 하지도 않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도 퇴사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다른 공단 관계자는 “역학조사는 유해물질 노출이 있었는지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고, 만약에 찾아낸다면 파장이 커져 작업환경도 개선될 수 있다”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상황이 있지만, 역학조사 생략 절차를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이수진 의원(비례)은 “직업성 질병의 경우 산재 노동자가 사업장의 유해 위험인자를 잘 알지 못하기도 하고, 기업이 영업상 비밀을 이유로 유해 위험인자를 밝히지 않기도 해 업무상 인과관계의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거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연구원에만 떠넘기는 것은 맞지 않다”며 “추정의 원칙을 폭넓게 적용해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궁극적으로는 일터에서 병들거나 다치면 산재승인 전 산재보험으로 우선 보장해 노동자를 신속하고 두텁게 보호하는 제도개선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