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 중 3명만 동의한 ‘능력주의 공정’이 다수 의견으로 둔갑

이혜리 기자

② 서울시 노동자들의 공정

지난달 23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 2016년 5월28일 홀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김군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메시지와 국화꽃이 놓여있다. 성동훈 기자

지난달 23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 2016년 5월28일 홀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김군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메시지와 국화꽃이 놓여있다. 성동훈 기자

서울시 산하 공공기관 노동자 설문
경기·평가·채용 때 “공정” 우선시
사회적 약자 등 ‘불평등’은 밀려

“그대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6년 전 이맘때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 한 시민이 써붙인 포스트잇의 문장이다. 2016년 5월28일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 용역업체 노동자 김모군(당시 19세)이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열차에 치여 숨졌다. 위험 업무의 외주화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안전보장 문제가 불거졌고, 서울시는 대책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했다.

여기에 갑자기 따라붙은 게 ‘공정’ 논란이었다. 소위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로 불린 취업준비생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공정하지 않다고 반발했다. 이들의 주장은 정치권과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됐고 절대 다수의 의견처럼 받아들여졌다. 어떤 것이 공정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없는 채로 공정 논란이 반복되면서 반대 의견은 쉽게 무시되기도 했고, 모든 영역에서 ‘공정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흘러갔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정을 내세웠지만 공약에서 비정규직 언급은 일절 없는 상태다.

경향신문은 서울시 노·사·민·정 협의회 의뢰로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가 수행한 ‘서울시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갈등사례 연구-공정 인식을 중심으로’ 용역연구 보고서를 확보했다. 연구진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논란된 서울시 산하 공공기관 3곳의 노동자 1만8543명 중 기관별 재직 인원·성별 인원·근속기간별 인원에 비례해 표본 500명을 추출했고, 지난해 11월10일~12월15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같은 설문조사는 처음으로, 설문지는 각 기관 인사팀과 노동조합을 통해 직접 배포됐다.

정규직 전환 찬성도 비등했지만
공정 논쟁에 있어서는 간과돼

공정에서 ‘사회적 약자’는 후순위

조사에서 일단 응답자들이 공정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 두 가지’를 물은 결과 ‘공정’의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다.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가치로 공정을 선택한 비율이 전체의 44.3%에 달했다. 그다음은 ‘경제적 안정’이었다. 근속기간 5년 미만인 응답자군에서만 공정과 경제적 안정 외에 ‘자유’가 순위권에 포함됐다. ‘공정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5점 만점에 평균 4.052점을 기록했다. ‘자녀에게 공정하게 살아야 한다를 인생의 원칙으로 교육할 생각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는 평균 3.976점으로 높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어떤 상황에서 중요한 것일까. 응답을 분석해보면 경기·평가·채용·선발에 관련된 상황이 상위에 몰려있고, 복지정책과 불평등에 관련한 상황은 모두 하위 순위에 위치했다. ‘심판이 운동 경기를 운영할 때’(1순위)는 5점 만점에 평균 4.626점으로 가장 점수가 높았다.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4.615점), ‘대학이 신입생을 선발할 때’(4.602점)가 그다음이었다. 반면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을 시행할 때’(4.404점),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국가 정책을 시행할 때’(4.357점)’는 후순위였다. 꼴찌는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할 때’(4.207점)였는데 이것이 중요하다는 응답 비율이 77.8%로 1순위보다 약 15%포인트 적었다.

더 구체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위한 첫 번째 과제’에 4가지 주장을 제시하고 동의 정도에 따라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부정부패 제거’ ‘대학 입시나 기업의 채용 절차에서 특혜를 제거하는 것’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 순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 시행’은 가장 점수가 낮았다. 채용 절차의 공정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정보다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콜센터 노조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지난해 6월18일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에서 중구 정동 로터리까지 행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국민건강보험공단 콜센터 노조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지난해 6월18일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에서 중구 정동 로터리까지 행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능력주의 공정’ 3명 중 1명 동의

공정에 능력주의를 결합한 질문을 던졌을 때 응답자들 생각은 한쪽으로 모아지지 않고 분산됐다. ‘개인이 처한 상황에 상관없이 오로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이 공정이다’는 문장에 동의하는 응답은 30.2%에 불과했다. 동의하지 않는 응답이 36.4%로 오히려 더 높았고,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가 33.4%에 달했다. 응답 평균을 점수로 나타내면 5점 만점에 2.873점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쪽에 가까웠다. 연구진은 이 문장 동의 여부에 따라 응답자들을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과 ‘능력중심주의 반대 집단’으로 구분했는데, 두 집단은 다른 이슈에 대한 입장도 다른 경향이 발견됐다.

‘학벌도 능력이므로, 학벌을 능력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이 공정하다’는 문장에 대해 전체 응답자를 기준으로 보면 동의 26.8%, 동의 안 함 41.6%, 보통 31.6%로 공정하다는 생각보다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그런데 능력중심주의 지지 여부로 나눠보면 지지 집단이 반대 집단보다 더 많이 동의하는 성향을 보였다.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은 사회경제적 불평등보다 채용과 선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시험 성적으로 줄 세우는 평가 방식이 공정하다고 믿는 태도를 보였다. 투자 수익을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며, 성불평등에는 덜 민감했다.

이 같은 집단 구분은 비정규직 인식 차이로 이어졌다.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은 반대 집단에 비해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의 필요성에 대해 ‘필요하다’는 쪽에 훨씬 기울어져 있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반대쪽 의견이 강했다. 이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공정 논란이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의 주도하에 이뤄졌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만큼이나 비등한 비율로 반대 집단이 존재하지만 공정 논란에 있어서는 간과돼 온 것이다.

또 전체적으로는 비정규직 필요성에 대해 평균 2.759점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서울시의 정규직 전환 평가는 2.960점으로 반대에 조금 가까웠지만, 찬성과 반대를 비율로 보면 각각 37.9%, 37.7%로 비슷했다.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도 ‘같은 직장의 동료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좋지 않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동의 쪽에 가까웠다. 연구진은 시험을 봐야만 평가할 수 있다는 강박이 매우 높아져 시험을 보지 않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정서가 함께 높아졌을 수는 있지만, 비정규직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능력중심주의 지지 집단에는 근속기간 5년 미만 응답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정 문제 ‘윤리적 가치’가 아닌
객관적·정량적인 방식으로 인식”
어떤 공정이냐, 반성적 논의 필요

“공정하다고 다 동의는 아니다”

연구진이 주목한 또 다른 부분은 응답자들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방식과 동의하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대학 입시 방식에 대한 질문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만으로 선발하는 방식이 공정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27.8%였지만, 이 방식에 동의한다고 답한 사람은 17.0%에 불과했다. 10%가량의 응답자는 ‘수능만으로 선발’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의는 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수능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은 학생들에게 대학 입시 자격을 부여하고 각 대학이 자율적 기준에 따라 선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공정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21.1%였지만, 동의한 사람은 29.4%로 동의가 더 많았다.

연구진은 “응답자들은 공정을 윤리적 가치가 아니라 특정한 평가 방식, 즉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그래서 개인의 선호에 따라 공정하지 않은 방식을 택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어떤 국가 정책이 공정하다는 의견이 다수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동의도 다수라는 보장이 없다”며 “반대로 그 정책이 불공정하다는 의견이 많더라도 그것이 다수의 반대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정치권·언론 등에서 공정과 비슷한 개념으로 통용돼 온 ‘정의’가 조사 결과에서는 공정과 다른 응답을 나타냈다. 부자가 세금을 100만원 내고 가난한 자가 세금을 10만원 냈을 때를 가정해 재분배 방식에 대해서 물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받는 복지 혜택은 비슷해야 한다’에 동의 67.1%, 공정 68.7%, 정의 57.5%로 공정이 가장 높았다.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한다’에 대해서는 동의 25.0%, 공정 19.1%, 정의 32.3%로 정의가 가장 높았다. 정의는 공정보다 더 적극적인 재분배 방식을 의미한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선거 때 공정 이야기로 언론이 도배했지만 선거가 끝난 지금은 공정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게 오히려 공정 담론이 선거 전략에 불과했음을 드러낸다”며 “1987년 이후 수십년간 한국인이 갖고 있던 능력중심주의를 (정치권·언론 등이)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장사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제는 반성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서 나오는 ‘차별적 공정담론’…“능력주의 신봉,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어”


지난달 19일 서울 강서구 공공운수노조 회의실에서 ‘차별적 공정담론’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

지난달 19일 서울 강서구 공공운수노조 회의실에서 ‘차별적 공정담론’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


문재인 정부 핵심 노동정책인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싸고 공정 논란이 불거진 뒤 노동계는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모두 노동자라는 점에서 노동계 내 갈등 불씨가 있었고, 논란을 제기하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소수의 문제집단으로 치부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도 있었다. 최근 노동계에서는 공정 논란이 무엇인지, 왜 나타나는지를 탐구하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은 지난 3월과 지난달 19일 ‘차별적 공정담론’ 토론회를 열었다.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진은 공정담론이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 확산된 신자유주의 체제와 양극화·계급구조의 고착화, 극단화된 경쟁 속에서 나왔다고 봤다. 각자도생의 노력이 결국 불평등을 정당화·고정화하는 차별 논리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담론을 분석했다.

류연미 연구자(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는 차별적 공정담론에서 작동하는 서사(내러티브)를 분석했다. 류 연구자는 “현재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피해자성을 담보하고, 그러면서 (공정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을 억울한 피해자로 정체화하고 있다”며 “그동안 비정규직이 사회적 약자로 받아들여졌던 인식에서 강자·약자 위치를 전복시키는 방식”이라고 했다.

문제는 공정담론이 여성·성소수자·장애인·비수도권 거주·비정규직 등 다양한 청년의 모습을 외면하고, 국가 책임도 면제한다는 점이다.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애초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출발선이 다르지만, 공정담론에서 장애인이 겪는 차별은 지워진다”며 “공정하게 시험 보고, 교육받고, 일하고, 살아가면 되지 왜 거리에서 시위를 하냐고 되묻는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무엇이냐”고 했다.

이재훈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은 공정담론을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적 과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연구실장은 “차별적 공정은 모두가 패자인 시스템”이라며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의 보상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이는 단기적일 뿐이고, 결국 그 사람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그들(공정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며 “모두가 공존하기 위한 대응이 중요하다”고 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Today`s HOT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케냐 의료 종사자들의 임금체불 시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2024 파리 올림픽 D-100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솔로몬제도 총선 실시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