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일터 안전·건강’ 노동기본권 선언

이혜리 기자

110차 총회서 결의…한국 ‘산재 빈발’에 산업안전 제도 개선 목소리

노동환경 보장 책임은 사측·정부에…협약 이행 등 정책적 대응 필요

국제노동기구(ILO)가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Safe and healthy working environment)’을 노동기본권으로 선언했다. 일터에서의 안전과 건강을 전 세계 노동자가 두루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로 인정한 것이다. ‘최악의 산업재해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한국의 노동자 산재 사망 사고가 심각한 상황에서 정부가 선제적으로 산업안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12일 고용노동부와 노동계에 따르면, ILO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지난 10일(현지시간) 110차 총회를 열고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노동기본권에 포함시키기로 결의했다.

ILO는 1919년 설립된 유엔(UN) 산하 노동 분야 전문 국제기구로 각국 정부와 노동계·경영계가 참여한다. 1998년 노동기본권 선언을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4개 분야를 기본협약(핵심협약)으로 정했다. 이전까지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 금지 등 4개 분야를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했는데 이번에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5번째 분야로 넣은 것이다. ILO는 구체적인 기본협약으로는 155호 산업안전보건 협약과 187호 산업안전보건 증진체계 협약을 채택했다.

이번 ILO 결의는 성장과 이윤만 앞세우기보다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 보호에 노사정이 힘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다. 2013년 4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의류공장 건물이 무너져 노동자 1143명이 사망한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중요성이 확산됐고, 최근 코로나19 사태는 노동자 건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ILO 회원국 중엔 개발도상국도 있어 비용 투자가 수반되는 산업안전 체계 구축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안전과 건강이 전 세계 노동자의 인권이라는 것이 부정되지는 못했다. ILO는 2019년 100주년 선언문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은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언급했다.

경영계는 당초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은 노사정 공동의 책임이라며 결의문에 관련 문구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최종 결의문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사용자와 정부의 책임이고, 노동자에게는 권리라는 노동계 주장이 수용됐다. 또 경영계는 ‘노동조건’이라는 단어를 쓰자고 주장했지만 보다 포괄적인 ‘노동환경’으로 정해졌다.

산업안전보건이 노동기본권에 포함되면서 회원국들은 협약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재해 예방 정책을 제대로 만들어야 하고 사용자는 재해 방지에 협력해야 한다. 한국은 기본협약으로 채택된 155호와 187호는 이미 비준한 상태다. 이에 따라 협약을 추가 비준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생기진 않는다. 다만 협약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ILO에 보고하는 주기가 6년에서 3년으로 짧아지는 등 엄격한 점검을 받게 된다. 노동계도 협약 내용을 일일이 따져보고 정부에 대책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는 “ILO 산업안전보건 협약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노사단체·노동조합과의 협의, 노동자 혹은 노동자 대표에 대한 정보 공개”라며 “국가의 산업안전보건 정책이나 사업장 내의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노동조합과의 협의가 되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이어 “왜 한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노동자 사망률이 높은지와 관련해 법은 제대로 돼 있는데 집행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법도 문제인지에 대해 본격적인 사회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ILO 결의 과정에서 161호 산업보건서비스 협약이 기본협약 후보로 유력하게 검토됐던 만큼 이 협약의 비준이나, 관련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161호는 다양한 보건전문가로 구성된 기구 설치, 노동자의 건강 모니터링, 위험성 평가와 예방 조치 등을 내용으로 한다. 오상호 창원대 법학과 교수는 “현재 법 체계가 사고성 재해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질병에 따른 사망도 많기 때문에 161호는 노동자의 건강 보호 차원에서 전문가들의 공동체 등 산업보건서비스 조직을 만들라는 내용”이라며 “한국도 이 보건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 올해 산재 사망 사고는 254건 발생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지만 여전히 하루에 1.7명꼴로 일터에서 사망한 것이다. 경영계는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 등은 법령 손질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노동부는 “산업재해 예방 강화를 고용노동 분야 국정과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정하고 있는 만큼 이를 기반으로 노사정이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는 노동환경 조성에 노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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