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괴롭힘 금지법 3년, ‘우산 바깥’에 여전히 절반이 산다읽음

조해람 기자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상사가 직원들을 괴롭히고 있다. 드라마 화면 캡처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상사가 직원들을 괴롭히고 있다. 드라마 화면 캡처

“야, XXX아. 너 미쳤냐?”

평범한 6월의 어느 휴일이었다. 직장인 A씨에게 상사는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상사의 업무 관련 메시지에 A씨가 ‘업무 지시는 일과시간에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돌아온 반응이다. 10분 가까이 이어진 욕설에 A씨는 큰 충격을 받아 출근하지 못하고 있다. 명백한 ‘직장 내 괴롭힘’이지만 A씨는 신고할 수 없었다. A씨의 직장이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신고조차 할 수 없는 건가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제76의2~3)’이 오는 16일로 시행 3년을 맞는다. 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현장에서는 괴롭힘이 줄고 신고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 대상인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노동자들에게 이 법은 여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다. 이들은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한다. 근로기준법은 비를 피하는 ‘우산’으로 흔히 비유되는데, 일 하는 사람 절반 가량은 아직도 우산 바깥에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것이다.

“괴롭힘 안됩니다, ‘불법’이니까요” 인식이 최대 성과

15일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사건 현황’을 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3년 동안 지방고용노동관서에 접수되는 괴롭힘 신고는 매년 늘고 있다. 신고건수는 지난달 기준으로 총 1만8906건인데 법이 시행된 2019년(7월16일부터) 2130건, 2020년 5823건, 2021년 7745건, 2022년(6월30일까지) 3208건으로 증가 추세다. 업종별로는 제조업(18.0%)과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15.9%)에서 괴롭힘 신고가 잦았다. 괴롭힘의 유형은 폭언(34.6%)과 부당인사(14.6%)가 많았다.

신고가 증가한 것은 괴롭힘이 늘어서가 아니라 ‘괴롭힘은 불법’이라는 인식이 정착한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본다. 2019년부터 직장갑질 분기별 정기조사를 해온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박점규 운영위원은 “법제화가 됐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신고조차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괴롭힘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신고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경향신문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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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갑질119가 이날 발표한 조사 결과(엠브레인퍼블릭 수행)를 보면 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응답은 2019년 33.4%에서 2022년 71.9%로 2배 이상 늘었다. 고용노동부의 올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도 실태조사’에서도 직장인들은 법 시행으로 최고경영자의 의지 및 관심 제고(73.8%), 사내 관련 제도 강화(64.5%) 등 효과가 있었다고 응답했다.

법이 알려지면서 현장에서 괴롭힘이 줄었다는 반응도 나온다. 직장갑질119의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2019년 44.5%에서 2022년 29.6%로 14.9%포인트 줄었다. ‘직장 내 괴롭힘이 줄었다’는 응답은 2019년 31.9%에서 2022년 60.4%로 늘었다. 예방교육을 받았다는 응답도 2019년 31.2%에서 2022년 54.3%로 올랐다.

‘모두의 우산’ 되려면…

신고자 보호 등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은 과제다. 직장갑질119에 제보한 직장인 B씨는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 인정받았는데 가해자는 견책 처분을 받았고, 오히려 B씨가 악의적인 소문과 따돌림 등 2차 가해에 시달렸다. 성과평가도 ‘0점’을 받았다. B씨는 노동청에 불리한 처우를 신고했지만 노동청은 진상조사는커녕 6개월 넘게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근로기준법상 신고 후 방치는 최대 500만원의 과태료에, 신고를 이유로 한 불리한 조치는 최대 징역 3년 또는 3000만원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직장갑질119는 신원이 확인된 직장 내 괴롭힘 제보 가운데 80.6%가 신고 후 방치(조사·조치의무 위반)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42.3%는 신고를 이유로 불리한 처우 등 보복을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갑질119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데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경향신문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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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A씨와 같은 ‘우산 밖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통계청·고용노동부 통계 등을 종합해보면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약 380만명,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노동자들은 약 700만명이다. 비정규직과 파견, 이주노동자까지 포함하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 가까이 되는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예방교육을 받은 적 있다’는 응답도 비정규직은 24.3%,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19.1%에 그쳤다.

직장갑질119 대표 권두섭 변호사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면서 일을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닐 것”이라며 “법률 규정은 그 적용 자체가 갖는 예방효과가 있다.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법개정에 국회와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인식 개선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고용노동부는 “제도 도입 이후 사용자와 사회적으로 근절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는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회사 구성원 간의 인식차가 좀 더 줄어들고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며 “직장 내 괴롭힘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업장에 대해서는 직권조사 및 감독 등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하게 대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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