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그 후, 손배폭탄이 남았다

간접고용 확산 속 원청은 교섭 거부…헌법의 ‘노동3권’ 손배소로 무력화읽음

김희진·이혜리·박용필 기자

① 손배소로 맞서는 기업들

하이트진로 화물기사 파업
이천·홍성 이어 본사 점거에
묵묵부답 사측 배상액 늘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지난 6월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의 배 안에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42)의 절박한 외침은 하청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새삼 드러냈다. 51일간의 파업은 임금 인상 타결로 끝났다. 하지만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끝나지 않았다.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으로 80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노조를 상대로 손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헌법 제33조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이지만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도 낮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은 임금 좀 더 올려달라고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손배 폭탄’을 맞고 있다.

경향신문이 취재한 노동자들은 손배 소송을 두려워했다. 소송 때문에 노조를 탈퇴하고, 협상에서 위축되고, 농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고 했다. 오랜 시간 이어지는 재판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고 가정이 파탄나기도 한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손배 소송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목숨을 끊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문제는 오히려 만성화됐다. 간접고용 구조는 확산됐다. 하청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에 교섭을 요구한다. 원청은 하청노동자의 고용주가 아니라며 거부한다. 이때쯤 ‘불법 파업’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 원청에 맞서 하청노동자들은 ‘옥쇄투쟁’ ‘점거농성’ ‘고농농성’을 벌인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환기돼 ‘실질적 교섭’이 이뤄진다. 교섭 끝에 노동자들은 겨우 임금 인상을 따낸다. 그리고 파업이 끝나면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원의 손배 소송이 남는다. ‘실질적 교섭’의 대가, 임금을 몇 푼 올린 대가가 손배 폭탄인 본말전도식 구조는 일종의 법칙으로 자리 잡았다.

노조에 대한 손배 소송을 규제하는 내용의 ‘노란봉투법’은 2015년 19대 국회 때 처음 발의됐지만 20대·21대 국회에서도 진전이 없다. 윤석열 정부는 노조의 불법행위를 엄단하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손배 소송의 노동권 침해를 방치한다. 손배 소송의 주체는 국가와 기업에서 ‘제3자’로 확대되고 있다. 연세대 학생들은 청소노동자들 집회가 학습권 침해라며 손배 소송을 냈다.

노동자들은 왜 점거와 농성을 파업 수단으로 쓰는가. 지난 5일 화물기사들이 운임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는 하이트진로 강원공장으로 갔다. 하이트진로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27억8000만원의 손배 소송을 냈다.

손배 소송을 당한 한 하이트진로 노동자는 손배 소송이 헌법 위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헌법에서 인정하는 농성을 했어요. 힘도, 돈도, 권력도 없다보니까 몸뚱어리로 저항을 하는 수밖에요. 그런데 저들(회사와 경찰)은 못하게 막죠. 화물노동자는 헌법에 나와있는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거예요.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법과 원칙’은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가요, 강자를 보호하는 법인가요?”

‘15년째 제자리’ 운송료 인상 요구에 돌아온 건 ‘27억 소송장’

<b>기약 없는 파업</b>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점거 농성 중인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과 건물 외벽에 22일 노조의 주장이 적힌 대형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화물연대는 지난 16일 손해배상 소송 및 가압류 철회와 해고자 원직 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기약 없는 파업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점거 농성 중인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과 건물 외벽에 22일 노조의 주장이 적힌 대형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화물연대는 지난 16일 손해배상 소송 및 가압류 철회와 해고자 원직 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화물기사가 운전대를 놓기까지

지난 5일. 홍천강을 따라 지나온 한적한 도로 끝. 늘어선 화물차들이 나타났다. 2차선 도로의 차선 하나를 가득 메웠다. 푹푹 찌는 아스팔트 위 화물차엔 거대한 맥주 광고가 붙었다. “리얼탄산 100% TERRA.” 화물차 주변으론 경찰차가 뒤섞였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화물차에 붙은 “하이트진로는 운송료를 인상하라” 현수막이 펄럭였다.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들이 파업을 시작한 지 65일째 되는 날이었다.

하이트진로 이천·청주공장 앞에서 파업을 시작한 이들은 이날 홍천 ‘하이트교’에서 경찰과 맞섰다. 하이트교는 하이트진로 강원공장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다. 전날(4일)엔 하이트교에서 맥주 출하 차량을 저지하던 화물기사 5명이 경찰 해산조치에 퇴로가 막혀 다리 아래 강물로 떨어졌다.

“이제는 갈 곳이 없다”며 홍천을 ‘마지막 투쟁지’로 삼겠다던 화물기사들은 열흘 뒤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사옥 옥상 광고판 위에 올라갔다. “노조 탄압 분쇄” “손배 가압류 철회”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파업 100일째가 다가오지만 운송료 인상 등에 대한 합의는 요원하다. 다른 구호들만 늘어났다.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들이 처음부터 파업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파업에 나선 이들은 하이트진로 물류 위탁 운송사인 ‘수양물류’ 소속으로, 이천·청주공장 소주를 운반하는 화물기사 130여명이다. ‘참이슬’ ‘진로이즈백’을 싣고 밤낮 고속도로를 달리던 이들은 “일할수록 마이너스”인 삶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파업에 나섰다고 했다.

모든 시스템은 회사(수양물류와 하이트진로)가 만들었잖아요. 수년간 운송료 문제를 방관해온 건 회사인데 파업을 했다고 모든 책임을 화물기사들에게 전가시키는 건 불합리하지 않나요. -박수동 (11년차·수양물류 소속)

11년째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로 일한 박수동씨는 일을 할수록 손해인 날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오전 6시쯤 공장에 출근해 하루 12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주 5일을 일해도 한 달 수입은 50만~100만원 남짓이었다. 월 800만원을 벌어도 화물차 할부금 340만원, 기름값과 도로 이용료 380만원을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름값 폭등으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100만~200만원씩 기름값이 추가로 나가는데도 운송료는 15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올해 들어 6월까지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았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생활비로 썼다.

다른 화물기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박준영씨(36)는 5년 동안 하이트진로 화물차를 몰면서 ‘할부를 긁어가며’ ‘돈을 쓰며’ 일했다. 감당할 수 없게 오르는 기름값이 “사람답게 좀 살아보자”란 마음을 들쑤셨다. “화물기사들 대부분 마이너스 통장 하나쯤 끼고 살걸요.” 박씨가 말했다. 반면 하이트진로는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보다 641% 증가했다.

사람답게 살려면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다니 두 번 죽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파업으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하면 교섭에 응하지 않은 하이트진로 책임은 없나요. 화물기사들에게 노동권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준영 (5년차·수양물류 소속)

지난해 12월, 화물기사들은 수양물류에 ‘거리당 운송료 30% 인상’ 등을 요구하며 대화를 시도했다. 수양물류는 2009년 유가 하락을 이유로 운송료를 8.8% 낮췄고, 이후 10년 넘게 운송료를 7.7% 인상하는 데 그쳤다고 화물기사들은 말한다. 같은 일을 하고도 맥주공장보다 소주공장 화물기사들이 30% 정도 낮은 운송료를 받는 점도 문제다.

화물기사들은 공병 운송까지 거부하며 협상을 요구했지만 수양물류는 응하지 않았다. ‘하이트진로 허락 없인 결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화물기사들은 지난 3월 화물연대에 가입했다. 박준영씨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다”며 “화물연대에 가입하면 그래도 하이트진로가 화물기사들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기대는 빗나갔다. 급기야 6월2일 파업에 돌입하며 운전대를 놓았다.

[파업 그 후, 손배폭탄이 남았다] 간접고용 확산 속 원청은 교섭 거부…헌법의 ‘노동3권’ 손배소로 무력화

노조, 당초 요구안 사라지고
손배 가압류 해제 등 목소리
하청사 회유 등 파업 무력화

파업을 하자 ‘소장’이 날아왔다

화물기사들은 4월5일 교섭 요구안을 담은 공문을 하이트진로에 보냈다. 노조는 “하이트진로가 실질적 사용자로서 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양물류는 하이트진로가 100% 지분을 가진 하이트진로 계열사인 데다 하이트진로 임원이 수양물류 대표이사·감사 등을 겸하고 있다. ‘원청’인 하이트진로가 임금 등 화물기사들 처우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게 노조의 판단이다. 화물차에 도색한 회사명도 ‘하이트진로’이고, 장기간 일한 화물기사가 다수여서 근무 전속성도 높다고 했다.

하이트진로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교섭을 거부해 갈등 수위가 높아졌다. 화물기사와 수양물류가 해결할 문제라는 게 하이트진로 측 입장이다. 하이트진로는 교섭 대신 손배 소송으로 맞섰다. 화물기사들이 “교섭에 나서라”라며 이천·청주공장을 점거하자 하이트진로는 6월17일 수양물류 소속 화물기사 등 11명을 상대로 5억7800여만원에 달하는 손배 소송을 제기했다.

헌법에서 인정하는 농성을 했어요. 힘도, 돈도, 권력도 없다보니까 몸뚱어리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법과 원칙’은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가요, 강자를 보호하는 법인가요? - 이진수(25년차 수양물류 하청업체 소속)

소송을 당한 이진수씨(53)는 우편으로 소장을 받아든 당시를 참담한 날로 기억했다. 협상 테이블에 한 번 앉아보기도 전에 소장부터 받아들었다고 했다. 소장을 가족들이 볼까 걱정도 됐다. 이씨는 “수십년 동안 일해도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을 청구했다”며 “최저임금에 가까운 운임을 받아오다 딱 한번 개선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이렇게 큰 죄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소장을 보면 하이트진로는 “화물기사들과 아무런 계약관계가 없다”는 표현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파업을 “불법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파업에 따른 차량 추가 수배 비용, 야근 및 휴일 출고로 인한 물류센터·공장 인력지원 비용 등을 계산해 손해금액을 산정했다. “향후 손해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므로, 손해액이 확정되면 추가로 증액하겠다”고도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화물기사가 노동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데 있다. 화물기사는 운송사와 위탁계약을 맺고, 운송사가 ‘화주’인 원청과 계약을 맺는 구조이다. 하이트진로가 자신은 화물기사들과 직접 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아니며 교섭을 거부하는 근거이다.

하청노동자들의 ‘교섭 대상 찾기’ 문제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지난달 22일 임금협상 타결로 끝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과 구조가 비슷하다. 대우조선해양 원청도 파업이 한 달 넘어갈 때까지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하이트진로 화물기사의 경우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된다. ‘실질적 교섭’을 제약하는 이중 장치에 막힌 셈이다.

윤 정부, 사실상 손 놓은 상태
‘구조적 문제’ 입법 보완 없인
유사 사태 반복될 수밖에

소주공장→맥주공장→본사옥상

손배 소송이 제기된 후 하이트진로 파업은 강대강으로 치달았다. 화물기사들이 충북 청주·경기 이천 소주공장에서 출고를 막자 하이트진로는 노조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액을 27억8000여만원으로 높였다. 부동산과 화물차에 대해 가압류 신청도 냈다. 수양물류는 파업에 참여한 화물기사 130여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화물기사들은 파업을 이유로 한 ‘해고’라며 복직을 요구했다. 운송료 인상 등을 둘러싼 갈등이 ‘손배 소송 취하’ ‘전면 복직’ 문제로 번졌다. 화물기사들이 양보할 수 없는 요구조건이 늘어나면서 교섭은 더욱 지지부진해졌다.

박수동씨는 “고용승계와 더불어 손배소 취하, 전면 복직이 현재로서 가장 주된 요구사항”이라며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운송료 인상 등 논의도 가능할 텐데, 교섭을 하는 중에도 하이트진로가 민형사상 고소·고발을 하는 걸 보면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하이트진로와 수양물류 측은 손배 소송을 교섭에서 유리한 ‘카드’로 사용했다. 수양물류는 8월4일 10차 교섭 직후 조합원들에게 “불법행위를 기획·주도한 최소 인원에 대해선 민형사상 책임이 불가피하다. 1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8일까지 복귀하면 민형사 절차를 전면 취하하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복귀 시한을 넘기면 추가손실에 대한 법적 대응이 불가피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수양물류 측이 처음부터 제시했던 ‘운송료 5% 인상안’을 내세웠다. 손배 소송을 회유와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셈이다.

화물연대는 이를 두고 “전형적인 노조탄압 시나리오”라고 주장한다. 교섭 해태, 파업에 나선 조합원 해고,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 복귀자에 대한 면책 회유로 이어지는 과정은 곧 파업을 무력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이트진로는 “화물연대가 물리력 행사 등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당사 운송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 불법행위에 대한 손배 청구는 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권리행사”라는 입장이다.

상황은 더 악화됐다. 화물기사들은 교섭안을 거절하고 강경 투쟁에 나섰다. 수양물류 측은 11차 교섭에서 오히려 더 후퇴한 안을 내놓았다. 급기야 지난 16일 화물기사들이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 점거를 택하기에 이르렀다.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은 ‘법과 원칙’이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박수동씨는 “하이트진로는 ‘하도급법 위반’을 내세우면서 쟁의행위에 개입할 수 없다면서도, 손해배상 책임은 수양물류를 건너뛰고 화물기사들에게 직접 묻고 있다”며 “지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선 노동자들이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부활절 앞두고 분주한 남아공 초콜릿 공장 한 컷에 담긴 화산 분출과 오로라 바이든 자금모금행사에 등장한 오바마 미국 묻지마 칼부림 희생자 추모 행사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황사로 뿌옇게 변한 네이멍구 거리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