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배소는 노동자의 손발을 묶어버린다”

김지환 기자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인터뷰

[주간경향] “회사 동료들과 지인들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모두 마무리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2009년 이후 13년 동안 경찰청이 철회하지 않고 있는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명 철창에 가로막혀 단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손배 가압류의 악몽으로 순간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과거에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쉽게 잠들지 못해 술을 마시는 날도 많습니다.”

쌍용차 노동자 채희국씨는 지난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를 당한 채씨는 2013년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승소해 복직했다.

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인 손해배상 소송이 채씨를 비롯한 쌍용차 노동자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사측이 금속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국가가 금속노조·노동자들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기 때문이다. 2심 판결 기준으로 회사가 입었다고 인정된 손해액은 원금과 이자를 합쳐 약 94억원, 국가의 손해액은 약 29억원이다. 합치면 120억원을 웃도는 액수다.

주간경향은 지난 9월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을 만나 손배·가압류의 문제점, 이번 정기국회 쟁점으로 떠오른 노란봉투법 이야기를 들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지난 9월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지난 9월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회사가 2009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개별 노동자들은 어떻게 빠지게 됐나.

“2015년 기업노조, 금속노조, 회사 3자가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철회하기로 합의해 금속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만 남아 있다. 대법원에서 2심 기준(약 94억원)으로 확정판결을 내리면 금속노조에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찔할 정도의 금액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노사 합의로 손해배상 청구 대상에서 빠지게 된 노동자들도 심리적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다.”

-2018년 경찰청 인권침해진상조사위원회는 파업 당시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손배소 취하를 권고했다.

“권고안이 나온 이후 경찰청과 수차례 접촉을 했다. 당시 민갑룡 경찰청장으로부터 사과도 받았다. 하지만 경찰청은 손배소를 취하하면 배임이 될 우려가 있다면서 대법원 판결을 받아본 뒤 판단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들도 만났지만 위원회 내에서 의견이 갈렸다. 그렇게 겉도는 시간이 흘러갔고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이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쌍용차의 새 주인이 된 KG그룹과 손배소 취하 문제에 대해 논의할 예정인가.

“2018년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 때 미해결 쟁점이 손배소 취하 문제였다. 일단 해고자 복직 문제를 먼저 풀어야 했기 때문에 손배소 문제는 아쉽지만 차차 논의하는 것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인도 마힌드라가 떠났고, KG그룹이 새 주인이 됐다. 기업노조, 회사, KG그룹이 최근 3자 실무협의를 진행하면서 이 문제도 논의했는데 매각 완료 뒤 과거 노사갈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해소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기업노조도 손배소 취하에 대해 쌍용차지부와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향후 매각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면 손배소 해소 방안을 KG그룹과 진지하게 논의할 계획이다.”

-최근 대법원과 경찰청에 쌍용차 노동자 24명의 트라우마 진단서를 제출했다고 들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손배소 취하 문제가 겉돌긴 했지만 해결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 기대가 무너져버렸고, 올해부턴 대법원 선고가 임박했다는 우려가 커졌다. 손배소 청구를 당한 당사자 67명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한 뒤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자는 제안을 했다. 다들 혼자 견디고 감추던 일이라 기대를 안 했는데 제안에 응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순차적으로 진료가 진행되는 상황이라 우선 24명의 진단서를 대법원과 경찰청에 접수시켰다. 진단서를 보니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다. 2009년 파업을 경험한 뒤 13년 동안 손배소 피고로서 재판 과정을 견딘 것이 정신건강을 위태롭게 했다는 점이다. 대부분 1년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노란봉투법은 2013년 47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주부 배춘환씨가 ‘4만7000원씩 10만명이 힘을 보태자’며 노란 봉투에 4만7000원을 담아 한 언론사에 보낸 데서 유래했다. 9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노란봉투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모든 노동자가 겪는 문제는 아니다 보니 국회의원들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노동계 내에서도 핵심 쟁점 사항은 아니었다. 쌍용차 이슈에선 해고자 복직이 늘 우선순위에 있었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 탄핵 촛불집회 당시 노란봉투법 서명을 받았는데 주도적으로 움직인 곳은 쌍용차지부를 제외하고 몇군데 없었다. 그러다 보니 폭발력 있는 이슈가 되지 못했다.”

-노란봉투법이 정기국회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나.

“대우조선해양이 하청노동자 파업에 대해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을 청구한 이후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낀다. 의원들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예전엔 관심도 없었는데 이번엔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만나 반대 의견서를 전달했다. 보수언론도 분석 기사를 집중적으로 쓰고 있다. 경총과 보수언론의 움직임이 어떻게 보면 달라진 분위기를 방증하는 것 아닌가. 다만 상황이 계속 좋을 순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문제가 잊히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들이 계속 목소리를 내고 역할을 해야 한다.”

-손해배상 당사자로서 손배 가압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손배·가압류는 노동자들의 손발을 다 묶어버린다.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없도록 한다. 몇백만원이 아니라 몇십억원이 기본이라 한 달 벌어 한 달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이다.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액수이다 보니 심지어 무감각해지기까지 한다. 결국 손배 청구의 진짜 의도는 노동자를 옥죄고 겁박하려는 것이다. 쌍용차의 경우 회사뿐 아니라 국가도 손배 청구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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