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감 2022

반도체 노동자는 현장에서 유해물질을 얼마나 알고 사용할까

유선희 기자
A씨가 ‘냄새 확인 개선 작업 내역’으로 작성한 업무일지로, A씨는 반도체공정 생산라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냄새를 맡아 조치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A씨가 ‘냄새 확인 개선 작업 내역’으로 작성한 업무일지로, A씨는 반도체공정 생산라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냄새를 맡아 조치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전제형 현장실습생으로 대기업 자회사에 입사한 A씨(40대)는 20년 넘게 반도체 사업장에서 설비 유지보수 업무를 하고 있다. 반도체공정 생산라인에 문제가 발생하면 냄새를 맡아 파악하고 조치한다. 가스감지센서가 공정에 다 설치돼 있지 않아 일일이 사람이 냄새로 확인해야 한다.

A씨는 24일 기자와 통화에서 “위험물을 취급하는 만큼 상시대응을 위해 2인1조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회사에 건의했는데도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어떤 물질인지 뭐가 섞였는지도 모르고 냄새를 맡아야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토로했다. A씨는 설비 세척일을 하면서 세척제인 불산과 과산화수소,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에도 노출됐다.

A씨는 2020년 악성 크롬친화성세포종 4기 진단을 받았다. 갈색세포종으로도 불리는 크롬친화성세포종은 신장 위쪽에 밀착해 있는 부신에 종양이 발생해 고혈압과 두통, 발한 등을 일으킨다. 수술로 종양을 들어낸 뒤 지금은 회사에 다니면서 추적관찰 중이다.

A씨는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 A씨는 “유전적으로도 문제가 없어 업무 연관성이 의심되지만 의학적으로 입증이 안 돼 불승인됐다”고 말했다. A씨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B씨(20대)는 경기도의 한 반도체 설비부품공장에서 3년 정도 일하다 그만뒀다. 화학물질에 대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현장에 투입됐는데, 일하면서 걱정이 더 커졌다. 부품 세척을 할때 끼는 라텍스 장갑이 얇아 찢어지는 일이 많은데 몸에 발진이 난 적도 있었다. 세척실에 설치된 국소배기장치(유해가스, 분진 등을 외부로 배출하는 장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B씨는 “당장은 문제가 안돼도 몸에 유해물질이 축적돼 암이나 질병으로 나타났을 때 산재처리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며 “물질안전보건자료(MSDS)가 현장에 배치돼 있다고 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노동자들은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의 유해성을 모르고 일한다”고 했다.

B씨가 다니던 공장에선 세척제로 쓰던 ‘TCE(트리클로에틸렌)’를 ‘BCS1000’으로 교체했다. 회사는 ‘친환경 제품’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BCS1000에는 1급 발암물질인 이염화프로필렌이 90~99% 포함돼 있다. B씨는 MSDS에 BCS1000이 발암물질로 표기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클린룸 반도체 생산현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클린룸 반도체 생산현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화학물질 사용기업의 사업주는 MSDS를 노동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2019년에 1000개 전자산업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안전보건실태에 따르면 MSDS를 제대로 갖춘 기업은 486개(48.6%)로 절반에도 못 미쳤다. 3곳 중 1곳(37%)이 법적 의무사항인 작업환경 측정도 하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인체에 해로운 작업을 하는 작업장은 다이클로로 메탄과 벤젠, 트라이클로로에틸렌 등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작업환경 측정을 해야한다.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의 이상수 활동가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물질에 대한 유해성이 많이 이야기 되지만, 추상적인 수준에서 인식이 바뀐 것이지 정작 현장노동자들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지식수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MSDS 게시 등 법적 의무를 지키는 수준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위험정보를 전달하는 안전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는 현장실습생들에겐 사전에 제대로 된 안전교육이 중요하다고 했다.

전자관 또는 반도체 소자제조업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직업성 암 산재 불승인률도 높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확인한 결과 전자관 또는 반도체 소자제조업에서의 직업성 암 산재처리 ‘불승인률’은 2017년 42.9%에서 2020년 50%, 2021년 51.6%, 2022년 9월 기준 53.3% 등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경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올해 발표한 ‘직업성 암 발생현황’ 분석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직업성 암 산재인정 사례는 414건이다. 산재보험 가입자 10만명당 직업성 암 승인율은 1.8명으로 독일(15.1명), 프랑스(11.39명)보다 훨씬 낮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직업성 암 산재 신청 자체가 적다. 그러다 보니 전체 근로자 집단에서 발생하는 암 대비 인정률 비중이 작다”며 “이는 근로자들 스스로 직업성 암 원인이 업무와 관련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승규 반올림 노무사는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일하는 작업환경의 발암성 위험 등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문제로, 작업환경에 대한 알권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반올림은 ‘알권리 3법’ 통과를 주장하고 있다. 알권리 3법은 우원식 의원이 발의한 산업안전보건법, 이동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산업기술보호법과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이다. 전·현직 노동자를 포함한 산재피해자가 안전보건 정보를 취득할 때 비공개조항 등 이유로 제약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다.

우원식 의원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는 사실 자료공개를 두고 벌어지는 긴 공방이었다”며 “일하다 죽거나 다친 재해자들과 그 유족들이 자료공개를 두고 받는 이중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안전보건자료 공개를 위한 법 개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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