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그늘도 없는 작업환경에서 일하던 건설 노동자가 뇌심혈관계질환으로 사망한 사건이 산재로 인정됐다. 갈수록 기후위기가 뚜렷해지는 만큼 노동자가 폭염 시 작업중지권을 실질적으로 쓸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건설노조 강원전기지부 원주지회가 확보한 업무상질병판정서를 보면, 서울북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는 한국전력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A씨(사망 당시 68세)가 지난해 8월1일 오후 3시51분쯤 원주시 흥업면의 한 공사 현장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사망한 것은 업무상 재해라고 지난 7월30일 판단했다.
전봇대를 심는 데 쓰이는 오거크레인 기사였던 A씨는 당시 4번째 전봇대 작업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쓰러졌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쓰러진 지 7일 만에 사망했다.
A씨가 쓰러진 지난해 8월1일은 폭염경보가 8일째 이어지던 날이었다. 최고온도 33.7도, 상대습도 73.6%로 체감온도는 35.4도였다. 오거크레인 운전석은 엔진열이 올라와 평지보다 더 덥다. 여기에다 A씨는 절연을 위한 보호도구도 착용해야 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은 사업주는 노동자가 폭염에 직접 노출되는 옥외 장소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 휴식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그늘진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늘진 장소는 마련되지 않았다. A씨 동료 노동자는 “고인이 쓰러지고 나서 ‘유일한 그늘’이었던 차량 밑에서 심폐소생술을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업무강도도 급성심근경색 원인이 됐다. 직업에 따른 육체적 업무강도 평가표를 보면 크레인 운전원은 업무가 힘든 직업군으로 분류된다. 아울러 전봇대를 심는 작업은 보통 4~6명이 하지만 A씨가 쓰러진 날은 4명이 작업을 했고 단단한 암반이 발견돼 작업시간이 오래 걸렸다.
질판위는 A씨가 오거크레인 최상단에서 폭염에 노출된 채 일한 점, 열사병을 의심할 만한 소견이 있는 점, A씨가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를 했던 점 등을 근거로 A씨의 급성심근경색은 업무상 질병이라고 판단했다.
A씨를 대리한 최승현 노무법인 삶 노무사는 “A씨가 스스로 일을 멈추고 쉴 수 있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노동자들이 ‘폭염 작업중지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법·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이날 전체회의에서 사업주의 보건조치 의무 발생요건에 폭염·한파 등 기후여건에 따른 건강장해도 명시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의결했다. 다만 작업중지 요건에 폭염·한파 등 기후여건을 명시하는 개정안 등에 대해선 당·정의 반대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