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커밍아웃…불행하냐고? 아니, 그게 뭐 어때서읽음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성소수자 가족 담은 다큐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말하는 ‘이런 세상’

<너에게 가는 길>이  오는 11월17일 정식 개봉한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활동하는 ‘나비’와 ‘비비안’, 그들의 자녀 한결과 예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엣나인필름 제공

<너에게 가는 길>이 오는 11월17일 정식 개봉한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활동하는 ‘나비’와 ‘비비안’, 그들의 자녀 한결과 예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엣나인필름 제공

한 사람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편협하다. 우리는 물리적 한계가 뚜렷한 몸에 기거하며, 경험이 선을 그어놓은 범위 안에서 살아간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유리잔에 빠져, 그 안에서 보고 느끼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파리다. 그래, 우물 안 개구리, 그거. 하지만 서로의 우물과 하늘을 공유할 때, 울타리를 조금씩 무너뜨릴 수 있다. 서로의 세계를 확장하며, 당연하다고 여긴 관습과 폭력을 넘어설 수 있다. 나는 독립출판물 ‘계간홀로’를 8년째 만드는 중이다. 우리 사회의 연애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연애가 어떻게 ‘정상성’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결탁해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비판하는 작업을 한다. 이 문제의식은 내가 맞닥뜨린 세계의 조각들이,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에게 선물처럼 준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의 커밍아웃, 여대에 입학해 캠퍼스에 들어선 순간 허공에 나부끼던 커다란 현수막(“레즈비언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 다양한 용기에 빚지며 나는 삐거덕삐거덕 배웠다. 지금도 종종 실수하며 배워가는 중이다. 세상이 멋대로 구획 지어놓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오가며, 서로에게 이르는 ‘길’ 위에서.

<너에게 가는 길>이 11월17일 정식 개봉한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활동하는 ‘나비’와 ‘비비안’, 그들의 자녀 한결과 예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네이버 영화 소개는 다음과 같다. “알고 싶어 너의 세상. 34년 차 소방 공무원 ‘나비’와 27년 차 항공 승무원 ‘비비안’,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내 아이의 커밍아웃 이후 오늘도 한 걸음 다가가는 중인 현재진행형 그녀들의 뜨거운 이야기.” 여성주의 미디어 공동체이자 성적 소수 문화환경을 위한 성적 소수 문화 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10번째 작품이자 연분홍치마의 활동가인 변규리 감독의 2번째 장편영화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은 2014년 시작되었고, 매달 둘째주 토요일에 정기 모임을 한다.

자식의 커밍아웃은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어야 할까. “내 아이의 커밍아웃 이후 오늘도 한 걸음 다가가는 중인 현재진행형 그녀들의 뜨거운 이야기”라는 소개만큼이나 산뜻한 에너지가 담긴 포스터가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17일 정식 개봉한다. 엣나인필름 제공

자식의 커밍아웃은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어야 할까. “내 아이의 커밍아웃 이후 오늘도 한 걸음 다가가는 중인 현재진행형 그녀들의 뜨거운 이야기”라는 소개만큼이나 산뜻한 에너지가 담긴 포스터가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17일 정식 개봉한다. 엣나인필름 제공

“보면서도 0.0001%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예고편에서 비비안은 게이 아들의 커밍아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트랜스젠더면 이게 뭐지? 생각을 하니까 머릿속이 복잡했던 건 사실이죠.” FTM 트랜스젠더(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아들 한결의 커밍아웃을 받은 나비도 낯선 용어 앞에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다. 세상은 어떤 정보를 과잉 공급한다. 이성애, 결혼, ‘여자답게’, 육아의 낭만…. 그래서 세상의 많은 부모는 낳은 직후 아기가 손가락만 꿈틀해도 가슴이 뛴다. ‘우리 애가 영재일지도 몰라!’ 반면 어떤 정보는 철저히 차단해 낯설고 이상한 것으로 만든다. 임신과 출산 단계에서 ‘우리 애가 성소수자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성소수자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정상성과 행복을 단단하게 연결 짓는 사회에서, 내 아이의 커밍아웃은 닥치기 전에는 상상조차 못한 재난 같다. 부모에게 하는 커밍아웃은 그래서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나’가 ‘나’로 존재하는 것이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침해한다고? 분명히 무언가 잘못됐다.

나비와 비비안도 처음에는 당황한다. 사회생활 ‘짬밥’이 찰 만큼 찬 두 사람이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안내서도 없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조차 있는 것을…. 막막해하던 두 사람은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나가고, 퀴어축제에 참가하고, 아들의 애인과 만나거나(비비안) 성별 정정 과정에 함께하면서(나비) 연대를 경험하고 변화한다.

비비안은 제작 비하인드 영상에서 커밍아웃을 받은 것이 큰 선물이라고 말한다. “내가 받을 자격이 된다는 뜻이니까.” 예준 또한 이 커밍아웃이 부모를 향한 신뢰와 사랑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퀴어축제에서 혐오 세력과 마주한 나비의 담담한 표정과 내레이션은 압도적이다. “이런 세상에서 애들이 살고 있단 말이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는 누군가의 존재를 눈앞에서 부정하고, 정의라고 생각하며 폭행한다. 나비는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알던 세상이 ‘나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많은 것이 요동친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아들의 커밍아웃…불행하냐고? 아니, 그게 뭐 어때서

처음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 부모 모임’ 깃발을 마주했을 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자식의 커밍아웃은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건이고,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성소수자는 가족에게서 고립되어 불행할 것이라는 이미지가 유통되는 현실에서 활동가들은 환하게 웃으며 참가자들을 안아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좋은 부모’는 이래야 한다는 정보와 의무가 넘치다 못해, 조금만 삐끗하면 자신이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사회에서 부모가 성소수자 자식을 외면하고 탄압하는 것은 당연한 전개인 양 군다. 그러나 강인하고 ‘쿨’한 소방 공무원 나비나, 파트너와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아들의 연애를 미소 띤 채 바라보는 비비안의 모습은 빈약한 상상력이 구축해놓은 ‘커밍아웃 후 비극적인 슬픔에 빠진 부모’에 갇히지 않는다. 묵직한 유머를 구사하며 울타리 밖으로 삐져나와 약동한다. 나비는 <너에게 가는 길>의 GV에서 부모님께 언제 커밍아웃을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부모님보다 자신이 준비됐을 때 해라. 그리고 안 받아주는 나쁜 부모도 있다. 그러면 버려라”라고 말한다.

성 소수자 부모 모임서 활동하는
소방 공무원과 항공사 승무원
두 엄마의 좌절 아닌 이해 도전기

‘정상’의 기준은 시대 따라 변해
다수가 옳다는 신념은 폭력적 칼
타인 삶 편집하려는 자 누구인가

누군가의 삶은 쉽게 내 이해의 규격을 초과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뭐라고? 타인은 ‘고작’ 나에게 이해받으려고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것은 혐오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낯선 존재이다. 사회가 정한 정상성 테두리 안에 있다고 안심하면서 남을 공격하는 이들은 알아야 한다. 지금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언제 변화할지 모른다. 시대는 바뀌고 규범은 변화한다. 흑인이 버스에 타면 끌어 내리고, 여성이 투표할 수 없었고, 기독교가 불법이었으며, 학교에서 아이를 때리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를 돌아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매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 없이 ‘내’가 다수이자 옳다는 신념은 폭력을 휘두르는 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자. ‘고작 나’에게는 개인의 삶과 존재를 반대할 자격이 없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샅샅이 알고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비조차도 아들 한결의 성적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구구단 외듯 한다. “제 아이는 바이 젠더, 팬 로맨틱 에이섹슈얼이랍니다.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답니다.”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웃어버리지만, 나비는 한결의 선택을 존중한다. 사랑하고 지지한다. 이해 없이도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다.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 지성사, 2015)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 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현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215쪽) 나비는 한결의 법적 성별 정정 판결 과정에 함께하며, 한결의 정체성을 ‘지정’하려는 목소리에 반발한다. “정정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지. 왜 레즈비언으로 살라 말라 해.”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삶의 편집권이, 누군가에게는 존재 전체를 걸고 싸워야 하는 투쟁의 영역에 걸려 있다.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 누구인가. 타인의 삶에 편집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으며 혐오를 일삼는 자는 누구인가. 변규리 감독은 제목의 ‘너’가 다양한 함의를 품는다고 말한다. ‘너’라는 지칭은 성소수자 당사자, 나비와 비비안에게는 한결과 예준 같은 자식,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 시민일 수도 있다. 알록달록한 깃발을 흔들며 ‘당신’에게 다가가는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2021년 11월17일 개봉박두! 포스터의 산뜻하고 따뜻한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영화를 놓치지 말자. 달력에 큼지막하게 적어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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