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용 편집국장, ‘그 길’ 따라 가다
▲ 제주서 단원고까지… 부서진 봄
노란 유채꽃밭 해사한 웃음들… 너희도 그랬겠지
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4명이 수학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학생 75명, 교사 3명만이 돌아왔다. 아이들의 꿈과 기억과 관계, 그들의 세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맹골수도에서 절멸됐다. 열일곱 살 고교생의 남은 생의 예상수입은 보통 인부 노임단가를 적용해 3억109만원이라는 계산서를 정부는 내놓았다. 계산기는 수백명 희생자의 존재와 여명(餘命)을 다 담고도 남았다.
승희는 “재밌게 놀다올게. 갔다오면 열공빡공해야지. 사랑해”란 편지를 수학여행 전날 가족에게 남겼다. 승희는 재미있게 놀지 못했고 ‘열공’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소연이 아빠 김진철씨는 딸의 장례를 치르고 택배를 받았다. 소연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개념원리수학, 영문법 책을 꺼내들고 아비는 울었다. 유방암 3기인 채원이 엄마는 엄마없는 세상을 살아갈 딸을 걱정했는데 딸을 먼저 보냈다. 엄마는 남은 시간이 좀 더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봄이 시작할 때 대한민국의 봄은 부서졌다. 만장(輓章)이 해를 가리고 호곡(號哭)이 파도보다 높았던 그 봄이 가고 다시 봄이 왔다. 250명 아이들이 한날한시에 사라진 슬픈 도시, 안산에도 꽃이 피었다.
소상(小祥)은 사망 1년 뒤 지내는 상례다. 소상 뒤엔 아침저녁에 하던 곡을 그치고, 비로소 채소와 과일을 먹는다. 세월호 유족들은 채소와 과일을 먹는 대신 상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유족들은 선체 인양→진상 규명→배·보상을 원한다고 1년 내내 절규했지만 정부는 배상금부터 꺼냈고, 유족들이 돈만 밝힌다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비명은 고통의 표현이다. 유족들은 비명 대신 머리를 깎았다. 삭발과 비명은 엄연히 다르지만, 분노와 절통(切痛)이 뒤섞여 있을 것이므로 단장(斷腸)의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은 3자들은 어느 것이 더 큰 고통의 표현인지 말하기 어렵다.
아이들의 여행은 제주를 89㎞ 앞두고 끊겼다. 일정대로라면 제주 동서를 일주하고 단원고로 돌아오는 3박4일 코스였다. 모든 여행의 끝은 귀향이다. 상상이지만,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봄꽃이 만개한 학교 앞에서 엄마 품에 안기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루지 못한 귀향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들이 가지 못한 그 길을 간다.
파란 ‘스즈끼복’(상하 일체형 작업복)을 입은 선원이 밧줄을 던져주자 부두의 일꾼이 쇠말뚝에 감았다. 배는 머리와 꼬리, 몸통이 밧줄로 묶였다. 항구에 묶인 배는 흔들리지 않았다. 1일 오전 11시. 제주항 제3부두. 청해진해운 소속 오하마나호와 세월호가 격일로 접안하던 32선석(船席)에는 일본 배가 정박해 있었다.
1년 전 세월호는 부두에 닿지 못했다. 배가 예정대로 도착했다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부두에 울려퍼졌을 것이다. 맞은편 사라봉에 핀 벚꽃 군락이 하얗게 한일자를 그리고 있었다.
제주연안여객터미널에 걸린 지도엔 제주로 들어오는 여객선 항로가 완도, 인천, 목포, 녹동, 부산 순으로 붉은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인천~제주 항로는 사고 이후 폐쇄됐지만 지도에는 반영돼 있지 않았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어디는 끊기고, 어디는 다니는지 공무원이 정한 그 기준을 알 수 없었다.
비극은 탐욕에서 시작됐다. 세월호는 화물 최대 적재량의 두 배인 2142t을 싣고, 초과한 적재량만큼 평형수를 줄였다. 선사(船社)는 과적으로 초과 수익을 챙겼다. 세월호 정식 선장 신보식씨는 “이 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배”라고 말했다고 선원들이 법정에서 진술했다. 화물과 차량의 고박 상태는 엉망이었으나 점검 결과는 OK였다. 해경은 출항을 허용했다.
제주 도착 후 아이들이 맨 먼저 찾을 곳은 서귀포 정방폭포였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라고 안내문에 쓰여 있다. 주차장에서 폭포 하단으로 내려가는 소로는 수백개 목조 계단으로 꼬불꼬불 이어졌다. 계단이 가파르고 아득해 나는 내려가지 못하고 하얗게 일어나는 포말(泡沫)만 쳐다보았다.
소인국 테마파크에는 피사의 사탑, 자유의 여신상 등이 실물 20분의 1 크기로 띄엄띄엄 서 있었다. 아이들은 여기서 제주 첫 점심을 할 예정이었다. “TV에서 학단(학생단체)이 탄 배가 가라앉는 걸 보고 가슴이 덜덜 떨렸다. 무슨 나라가 이러냐고 다들 한마디씩 했다”고 30대 여직원은 말했다.
사고 당시 수온은 약 12도였다. 이 온도에서 사람은 최소 6시간 이상 생존할 수 있다(<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 어선들이 주변을 에워쌌고, 더 많은 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기다렸고 선원들은 달아났다. 해경 소형선은 세월호 내부 상황도 모르고, 구조 방법을 논의하지도 않고, 구조작전이랄 것도 없이 다가와 세월호 주변만 맴돌았다.
최초 신고로부터 1시간30분 동안 해경은 배 안에 들어가지 않았고, 당연히 배 안의 사람을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저희는 사고 후 대처가 잘못됐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죽은 건데, 이런 것을 교통사고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아남은 유소은 학생이 증인 신문에서 말했다.
국가는 작동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서서히 가라앉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국가가 우리 생각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게 됐다. 순종(順從)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이 더 부끄럽고 아프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스라엘인 요나는 사흘 밤낮을 고래 배 속에 있다가 나왔지만(구약성서, 요나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질 녘, 아이들이 묵기로 한 한림의 리조트는 부산에서, 천안에서 수학여행 온 다른 중·고교생의 무리로 한창 북적였다. 몇몇 여학생들은 입술을 빨갛게 칠했다. 노래방에서 아이들은 금색 가발을 쓰고, 노래 부르고, 탬버린을 흔들며 뛰고 춤추며 놀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인색했다. 대통령이 등을 돌리면서 유족들은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존재로 공격받았다.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가장 특혜를 받는 특권층으로 지목되고, 고통과 슬픔을 여러 가지 잣대와 기준으로 후벼팠다.
전국의 초·중·고교에 폐지됐던 수학여행은 올봄부터 재개되었다고 청도에서 온 한 교사가 말했다. 산굼부리, 섭지코지, 주상절리대의 노란 유채꽃 벌판은 현기증이 났다. 여행객들이 노란 바다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림공원 왕벚꽃동산에 핀 벚꽃과 유채꽃은 하얀색, 노란색 물감을 반씩 풀어놓은 것 같았다. 학생들이 셀카봉을 늘어뜨려 물든 얼굴을 담았다.
아이들은 비행기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공항 로비에는 수학여행 그룹이 많았다. 학생들의 손엔 연노란색 선물 봉지가 한두 개씩 들려 있었다. 감귤 초콜릿, 초코 크런치….
1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건우 엄마는 아들의 신을 신고 다닌다. 승희 아빠는 거인이 돼서 배를 끌어올리는 꿈을 꾼다. 호성이는 “엄마하고 나는 연결되어 있잖아”라고 생전에 말했다. 부모와 자식의 세계는 분리되지 못하고 두 개의 세계를 나눠 갖고 있었다. 담쟁이 덩굴처럼 서로 휘감겨 있었다.
일정대로라면 오후 4시쯤 아이들을 태운 전세버스는 단원고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안산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거리에 내걸린 노란 추모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벚꽃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흐린 날씨에 잿빛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하더니 후드득 결국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날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부모도 아직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