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상가 임대 옥탑방 버려진 생활용품 화분으로 재활용
지렁이·벌 키우는 자연농원… “이젠 주민과의 소통이 과제”
22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신발도매상가 B동. 신발 상점이 다닥다닥 붙은 복도를 지나, 벽에는 빛바랜 전단지가 잔뜩 붙었고 수십년 발길에 모서리가 뭉툭해진 계단을 따라 6개 층을 오르면 눈 앞에 색다른 옥상이 펼쳐진다. 플라스틱 반찬통을 잘라 만든 우편함엔 ‘청년 허브 608’이라 쓰여 있다. 너른 옥상 곳곳에 풀꽃을 심은 변기, 세탁기, 욕조가 놓여 있다. 엉킨 전선을 타고 넝쿨이 자랐고, 벌들은 청계천 하늘을 날아다녔다.
청록색 페인트가 벗겨진, 두 개의 창과 양쪽 문이 있는 옥탑방은 옥상 출입구와 맞물려 눈, 귀, 입을 활짝 열고 있는 사람 얼굴을 닮았다. 이 옥탑방엔 이상한 청년들이 생활한다. 참가자 모두 한 쪽 발을 바닥에 붙여야 하는 파티를 열고 주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에서 ‘유물’을 찾아 벼룩 시장을 연다. 직접 딴 꽃을 차로 우려 마시고, 돋보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실험(?)도 한다.
동대문 옥상낙원(DRP : Dongdeamoon Rooftop Paradise)은 지난해 2월 문을 열었다. 서울시 청년허브 사업의 일환으로 동대문의 ‘자원’을 조사하기 위해 모인 청년들은 주변에 널린 기존 자원에서 새로운 가치·문화를 모색했다. “지역의 자원과 청년의 아이디어가 만났을 때 어떤 재밌는 것이 나올까.” 호기심 많은 청년들이 실험에 나섰다.
동대문에 자리잡기가 수월했던 건 아니다. 대학에서 공예학을 전공한 이지연씨(25)는 “24시간 숨가쁘게 돌아가는, 소매상가가 빽빽하게 늘어선 동대문에서 청년들이 시간과 공간을 파고들 틈이 없다”고 느꼈다. 손바닥만한 땅에도 비싼 임대료를 내야하는 동대문에선 가게 앞에 작은 의자 하나를 놓는 것에도 상인들끼리 신경전이 벌어졌다.
10평 옥탑방을 빌린 청년들은 폐가구나 고장난 가전기기가 쌓인 채 방치된 300평 옥상을 발견했다. 옥상은 “도시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빈 옥상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려면 돈보다 이웃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18t 쓰레기를 치우고 나니 옥상은 “독립적이면서 개방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옥상낙원’에서 건물숲을 내려다본 청년들의 눈에 곳곳의 빈 옥상이 들어왔다. 새로운 공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가진 곳이 도시에 널려있었다.
청년들은 옥상과 옥상을 잇는 전령으로 벌을 떠올렸다. 벌은 이들이 추구하는 인간관계의 메타포이자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다. 청년들은 돈으로 옥상을 구매하는 대신 관계맺기로 잠긴 옥상문을 여는 대안적 방식을 생각해냈다. 이들은 빈 옥상의 건물주나 입주자에게 “저희가 벌을 키우는데 빈 옥상에 꽃을 심어도 될까요” “꿀을 좀 땄는데 드셔보시겠어요”라며 다가간다. 이씨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질지 모르지만, 유쾌하고 즐거운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잖아요”라고 했다.
옥상을 차지한 청년들이 지역주민·상인들에게 다가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낯선 청년들을 두고 상가에선 “맨날 공사하는 거 보니 인테리어 업자”, “인터넷 쇼핑몰 사장”, “옥상 청소도 잘하고 착해보이는데 장판도 못 깐 불쌍한 애들” 등 온갖 소문이 돌았다. “다들 열심히 사는 곳에서 장난치는 것 아니냐”며 불편해 하는 이도 있었다.
김현승씨(35)는 “이곳 분들 삶의 속도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가가려 했다”고 했다. 늘 밝게 인사하고 옥상을 깨끗이 치우는 청년들에게 주민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 때마다 청년들이 화분을 놓는 옥상의 영역이 넓어졌다. 사람이 모이자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큰 모자를 쓰면 1층에서도 잘 보이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아이디어에 30년 봉제공장을 운영한 사장님과 디자이너가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머리를 흔들면 빛이 나거나 진공관을 삽입해 비디오 게임에서 이기면 진동하는 모자를 만들며 지역 주민들은 즐거워했다.
옥상 생활의 불편함마저 청년들에겐 즐거움이다. 주민들이 버리고 간 물건을 골라 ‘옥상유물파티’를 열기도 하고 층간소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한 쪽 발은 바닥에서 찰싹 붙인 채 떼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는 ‘찰싹 파티’를 연다. 처리하기 곤란한 음식물 쓰레기는 ‘지렁이 하우스’로 해결한다. 김씨는 “역발상을 시도하니 층간소음을 일으키면 안된다는 제약 조건이 재밌어졌다”며 “지역주민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청년들은 ‘옥상낙원’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새로운 것을 꿈꾼다. ‘옥상농부’ 박찬국씨(56)는 “지금껏 동대문을 만들어온 산업, 문화, 생활을 재료로 청년들이 진입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생활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며 “새로운 문화를 매개로 지역 주민들이 교류하며 끊임없이 ‘다른 형식의 마주침’을 만들어가려 한다”고 했다.
<조형국 기자 situatio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