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확산

3·4등급 피해자 “정부, 등급 나누지 말고 모든 피해자 보호해야”

김기범 기자

“정부가 피해자들을 폐손상만의 등급으로 나누지 말고 모든 피해자를 보호해 줬으면 좋겠어요. 특별법을 제정해서 최소한의 의료비만이라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8년여 동안 가족 네 명이 모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겪었으면서도 ‘폐 이외의 질환’이라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는 ㄱ씨(32)는 자신들을 외면해온 정부에 대한 원망에 앞서 긴급한 의료비만이라도 지원해 주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2014년 12월 국립환경과학원이 이미 가습기 살균제가 폐 이외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환경부에 제출했고, 환경부가 이를 무시해왔다는 사실(경향신문 5월11일자 1·3면 보도)이 언론보도로 공개된 후에도 피해자들은 분노에 앞서 참담한 현실을 보듬어 줄 정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ㄱ씨 가족의 불행은 2008년 11월 가습기 살균제를 구매해 1년6개월 정도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ㄱ씨는 두 아이와 함께 천식을 앓고 있고, ㄱ씨의 남편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급만성 축농증 진단을 받았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폐손상 이외의 질환을 앓는다는 이유로 4등급, 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을 받은 탓이다.

정부는 1·2등급(거의 확실과 가능성 높음)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에게는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3·4등급(가능성 낮음과 거의 없음)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있다.

ㄱ씨 가족을 포함한 3·4등급 피해자들의 고통은 단순히 “폐손상이 아니다” “PHMG·PGH 성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외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올해 열 살인 ㄱ씨의 첫째 아이는 상세불명의 폐렴 진단을 7차례 받았고, 열경련을 8회 겪었다. 급성 신우신염, 비염, 축농증까지 어린 나이에 수없이 많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피해자로 인정조차 되지 못했다. 둘째 아이는 밤에 잠을 잘 때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코가 막혀 밤새 고통을 호소하기 일쑤다.

정부가 그동안 외면해온 폐 이외 질환 피해자는 ㄱ씨 가족만이 아니다. ‘3·4등급 피해자 모임’ 이은영 대표 등 피해자들이 자체적으로 취합한 일부 피해자들의 폐 이외 질환 데이터에서 전체 23명 중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피해자는 15명으로 집계됐다.

피해자들이 앓고 있는 질환은 상세불명의 온몸 발진, 가려움, 상세불명 피부염, 두드러기가 다수이고, 상세불명의 피부농양 등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부질환들이다.

이 대표 자신의 피부도 할머니처럼 쭈글쭈글해진 상태고, 이 대표의 아들 역시 피부가 뱀껍질처럼 벗겨지는 아토피에 시달리고 있다. 기관지염 등 호흡기계통 질환은 23명 모두가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환경과학원의 2014년 12월 보고서에서 호흡기질환, 피부질환 가능성이 확인된 것을 비춰보면 실제 환자들의 질환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환경부가 임상 결과가 필요하다며 최근에야 조사를 시작한 것에 대해 뒷북 행정이라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2012년부터 가습기 살균제의 폐 이외 질환 영향 가능성을 제기해온 영남대 생명공학부 조경현 교수의 연구에서도 최근 혈관 노화 사례가 확인됐다. 조 교수가 이끈 연구진에게 검사를 받은 43세 여성 배모씨는 혈관 나이가 80대 이상으로 측정됐다. 다른 42세 여성도 혈관 나이가 57세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 여성은 2005년과 2006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탓에 임신 중인 태아까지 두 아이를 잃었다.

조 교수는 “이미 동물실험과 피해자들의 실제 질환에서 연관성이 입증되고 있는 만큼 정부는 피해자들 후유증에 대해 종합적인 조사, 연구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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