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이제 남은 분들 37명뿐

남지원 기자
2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 연합뉴스

2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 연합뉴스

“저희 명예를 장관께서 꼭 회복시켜 달라.”

지난 10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취임 사흘만에 경기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그곳에 거주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는 “해방 70년이 되도록 아직도 명예회복을 못 했다”면서 정 장관의 손을 잡고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당부를 했다. 89세 할머니가 남긴 이 말은,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김 할머니가 23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나눔의 집은 밝혔다. 정부는 유족들에게 조전을 보냈으며 정 장관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날 저녁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지내다 17살 때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끌려갔다.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강제동원’이었다. 몇 번이나 탈출하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그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왼쪽 고막이 터져,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3년 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7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전쟁이 끝난 뒤 두만강을 넘어 귀국했고 위안소로 끌려가기 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다시 만났다. 하지만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1998년 나눔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할머니는 혼자 살았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갖은 고초를 겪어온 할머니는 위안부 강제동원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데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2007년 2월에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 주최로 미 의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참석해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증언했다. 할머니의 증언은 그 해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혼다 의원은 뒤에 “이용수·김군자 할머니가 직접 증언한 것이 결의안 통과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서한을 보냈다. 김 할머니는 매주 수요 집회에 나가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데에도 앞장섰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에는 명동성당 미사에 초대받아 교황을 만났다.

김 할머니는 2015년 말 한일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며 ‘불가역적 합의’를 했다고 발표하자 “피해자는 우리인데 정부가 함부로 합의를 해놨다,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며 졸속협상에 항의했다. 지난 5일에도 나눔의 집을 방문한 에드워드 브라운스타인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을 만나 한일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지난해 8월에는 강일출, 길원옥 할머니 등 11명과 함께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다면서 정부를 상대로 1억원씩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증언했던 이용수 할머니가 23일 오후 김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증언했던 이용수 할머니가 23일 오후 김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영화배우 유지태씨가 23일 오후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다. 유씨는 나눔의 집의 정기후원자로, 경기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자주 방문하곤 했다. | 연합뉴스

영화배우 유지태씨가 23일 오후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다. 유씨는 나눔의 집의 정기후원자로, 경기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자주 방문하곤 했다. | 연합뉴스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1억원, 나눔의 집에 1000만원, 가톨릭 단체에 1억5000만원 등을 기부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으면 그것 또한 기부할 생각이었다. 2015년 5월 네팔에서 대규모 지진이 났을 때에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함께 쌈짓돈을 모아 불교계 구호단체에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 보이며 역사와 마주했고 타인의 고통에도 손을 내밀었던 김 할머니의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이제 37명으로 줄었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체결 이후에만 9명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 피해자들은 전원이 85세 이상의 고령이며 평균연령은 90.4세다. 피해자 중 상당수는 고령과 지병으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채로 병상에서 지내고 있다.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과 사죄, 명예회복을 지켜봐야 할 피해자들이 매년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은 이날 나란히 논평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하루속히 일본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민사회에서는 피해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있을 때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일본과 위안부 합의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아직까지 “피해자와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도출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이다.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문에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들어선 경위를 조사하기로 했고,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수차례 위안부 합의에 대해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 재협상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 정부의 기념사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 19일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2018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을 지정하고 2019년 위안부 연구소를 설치·운영할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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