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시작된 이 가족의 이름은 ‘다시는’ 입니다

장은교 기자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으로 뭉친 김용만씨와 김미숙씨, 황상기씨(왼쪽부터)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관련 토론회를 마친 뒤 담소를 나누고 있다.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로 아들을 잃고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김미숙씨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미래를 얘기하고 나서야 미소를 보였다. 김영민 기자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으로 뭉친 김용만씨와 김미숙씨, 황상기씨(왼쪽부터)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관련 토론회를 마친 뒤 담소를 나누고 있다.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로 아들을 잃고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김미숙씨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미래를 얘기하고 나서야 미소를 보였다. 김영민 기자

산재로 가족 잃고 가장 많이 썼던 단어…‘다시는’
죽음에서 맺어진 ‘또 하나의 가족’들 이름입니다

이 가족의 이름은 ‘다시는’이다. 보통의 가족은 탄생으로 맺어지지만, 이 가족은 죽음에서 시작됐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와 삼성백혈병 피해가족들, 고교현장실습생 유가족들, 드라마제작현장의 노동착취 현실을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PD의 가족들이 모여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을 만들었다. 지난달 26일 아름다운재단의 ‘2019 공익활동가 네트워크 지원 사업’에 공모해 정식등록도 마쳤다.

고 김동균, 고 김동준, 고 김용균, 고 이문수, 고 이민호, 고 이한빛, 고 홍수연, 고 황유미, 한혜경. ‘다시는’에 함께하는 부모들이 가슴에 품은 이름이다. 이들은 일하다 목숨을 잃거나 병을 얻었다. 어떤 이의 죽음은 이름이 곧 사건이 될 만큼 사회적 주목을 받았지만, 어떤 이의 마지막은 너무 쉽게 잊혀졌다. 큰 사회적 관심을 받은 죽음 역시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터에서 다치고 아프고 죽은 이들이 억울함을 벗기까지 피해자 가족들은 인생을 걸고 싸워야 했다.

[커버스토리]죽음으로 시작된 이 가족의 이름은 ‘다시는’ 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서로 모르고 살던 산재 피해자 가족들은 지난해 12월 김용균씨의 죽음을 계기로 뭉치게 됐다. 자식을 억울하게 떠나보낸 아픔을 먼저 겪은 이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김씨 가족을 돕겠다고 나섰다.

함께 장례식과 추모식에 가고 밥을 나눠 먹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한겨울 거리집회에서 손을 잡았다. ‘다시는’이라는 이름은 산재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나눈 대화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에서 착안했다. 이름처럼 이들의 바람은 하나다. 다시는 내 아들·딸과 같은 죽음이 없기를.

‘다시는’은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의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운동을 시작했다. 지난달 28일과 29일 경기 마석 모란공원과 서울 여의도에서 황유미씨(삼성백혈병 산재피해자·2007년 사망)의 아버지 황상기씨(64)와 김동균군(토다이 고교현장실습생 산재피해자·2015년 사망)의 아버지 김용만씨(58), 김용균씨(태안화력발전소 산재피해자·2018년 사망)의 어머니 김미숙씨(49)를 만나 ‘다시는’으로 함께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불행 탓하거나 누명 씌우는 그들 이젠 못 믿어
‘안전한 일터’, 우리가 아니면 누가 나서겠어요

<b>같은 길 걷는 ‘새 가족’</b>김용만·김미숙·황상기(왼쪽부터)씨가 지난 4월29일 함께 걷고 있다. ‘산업재해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을 만든 세 사람은 전날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김용균씨 추모 조형물 제막식과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국회의원들과의 이야기마당에 함께했다. 김영민 기자

같은 길 걷는 ‘새 가족’김용만·김미숙·황상기(왼쪽부터)씨가 지난 4월29일 함께 걷고 있다. ‘산업재해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을 만든 세 사람은 전날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김용균씨 추모 조형물 제막식과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국회의원들과의 이야기마당에 함께했다. 김영민 기자

- ‘다시는’엔 어떻게 참여하게 됐습니까.

김용만씨 = 저는 고교 현장실습생의 유가족입니다. 2015년에 제 아들 동균이를 잃었는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혼자 싸우다 보니 굉장히 힘들었어요. 교육부가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 아래 ‘죽음의 현장실습’을 더 확대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건 불 보듯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현장실습제 폐지를 2015년부터 외쳤지만 잘 안되더라고요. 이번에 용균이(‘다시는’의 부모들은 서로의 자식을 이름으로 부른다.) 사건이 터지고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을 보고 ‘우리 유가족이 함께 싸울 때만이 뭔가 되겠구나’ 생각해서 모이게 됐습니다.

김미숙씨 = 유가족들이 나서지 않으면 계속 이런 죽음과 사고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 자식뿐 아니라 여태까지 수만명이 죽었잖아요. (2001~2018년 산재사망자는 4만2359명으로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매년 약 2400명꼴로 목숨을 잃는다. OECD 가입 국가 중 1위다. 이는 정부에서 공식 산재로 인정한 사람만 집계한 숫자여서 실제 피해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도록 일한다’는 말은 적어도 한국에선 과장이 아니다.) 서민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면 다 벌을 받는데, 기업들은 큰 산업재해를 일으켜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 게 너무 원통합니다. 자식은 우리한텐 모든 것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구조적인 문제로 죽었는데도 정치인도 기업인도 눈감아버리고 그냥 넘어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우리가 아니면…누가 나서겠어요.

황상기씨 = 우리 유미는 삼성 반도체공장에 다니다가 급성골수성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거든요. 삼성은 지금도 작업환경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요. 공개를 안 한다는 건 밝힐 수 없는 유해물질이 많다는 걸 간접적으로 얘기하는 거거든요. 근데 혼자서 단일사건으로 목소리를 내다보면 피해자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만 해요. 유가족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다보면 큰 목소리가 될 거라고 봐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나 지금 공부하는 학생들이 노동자가 됐을 때는 조금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이 피해자 네트워크를 마련했습니다.

■ 거짓말, 잊힘, 조롱…산재 가족이 만나는 벽

- 피해 가족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황상기씨 = 지난 1월쯤 용균이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됐을 때였어요. 어떤 단체에 계신 분께서 용균이 어머님이 너무 힘들어하신다며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서울시청 뒤에 있는 음식점에서 용균이 어머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너무 힘들어 보였고, 외로움과 초조함이 역력히 묻어나서 참 안타까웠거든요. 우리 유미 죽었을 적에…그때 내 모습 보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었어요.

김미숙씨 = 어떻게 지내시는지, 어떻게 지내야 잘 지내는 것인지 제가 여쭤봤어요. 황상기 어르신은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산재 인정 투쟁을) 시작했고, 10년 동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삼성과 합의까지 이끌어내신 걸 보고 정말 존경스러웠어요. (강원 속초에서 택시기사로 살던 황상기씨는 2007년 딸 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이종란 노무사와 함께 삼성 작업장에서 발생한 직업병을 밝혀내기 위해 산재 인정 투쟁을 시작했다. 황씨는 삼성의 거액 회유를 거부하고,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를 만들었으며 2018년 삼성으로부터 공식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저는 정말 죽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떻게 이 고통을 이겨내고 버텨내시는지 그게 정말 궁금해서 꼭 만나 뵙길 원했어요. 너무나 인간적이고 마음으로 안아주시는 느낌이 들어서 많이 포근했습니다. 이분이 저한테는 선생님입니다.

김용만씨 = 제 아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매주 수요시위를 하고 학교를 찾아가고 교육부에 가고 그렇게 싸웠는데도 수연이(홍수연양, 2017년 LG유플러스 상담 업무를 대행하는 LB휴넷의 전주 고객센터에서 고교 현장실습 중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사망), 민호(이민호군, 2017년 제주 용암해수단지 내 음료공장 제이크리에이션에서 고교 현장실습 중 프레스 기계에 눌려 사망)…또 그런 일들이 생기니까 가슴이 찢어졌어요. 동균이가 그때 만 18세, 미성년자였고 다들 그래요. 제 새끼나 똑같죠. 노동자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민호 아버지나 수연이 아버지 1인 시위할 때 같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들에게) 전화는 쉽게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이번에 용균이 일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유가족들이 뭉쳐서 얘기하게 됐어요.

매해 2400여명씩 희생…20년간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커버스토리]죽음으로 시작된 이 가족의 이름은 ‘다시는’ 입니다

-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면 처음엔 위로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유가족들을 모독하거나 가짜뉴스까지 나돕니다. 피해자 가족모임이 이런 상황들을 이겨나가는 데 도움이 되나요.

김용만씨 = 한국 사회에선 자살을 보통 본인이 나약해서 죽었다고 치부해버리거든요. (김씨의 아들 동균군은 군포 e비즈니스고 3학년 재학 중 뷔페식당 토다이 분당점에 고교 현장실습을 나간 지 5개월 만에 물류창고 옆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회사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했고 경찰도 단순 변사사건으로 처리했지만, 후에 동균군이 회사에서 폭행과 폭언, 성추행과 성희롱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가 진상규명을 위한 집회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만 좀 해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어르신들은 ‘에이 미친놈들’ 그랬어요. ‘자살한 것 가지고 돈 뜯어내서 뭐하겠다는 거냐’ ‘얼마 받았느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저희 형제 중에서도 ‘괜히 시간 버리지 말고 마음 더 독하게 먹고 아들 몫까지 열심히 살아라’ 그래요. ‘할 만큼 했다, 이제 보내줘라’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정말 가슴을 후벼 파는 거예요. 피를 나눈 형제도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우리들은 자식을 잃은 당사자라 만나서 얘기하면 친형제 이상으로 좋은 것 같아요. 공통분모로 안고 있는 아픔을 얘기할 때 치유도 되고, 다 터놓고 얘기도 하고요. 잘못된 부분을 고치자는 얘길 하면서 용기도, 힘도 생깁니다.

김미숙씨 = 주위에서 (용균이 기사) 댓글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봤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한 흔들림이 전혀 없었어요. 왜냐면 그런 댓글들은 우리가 이 일을 못하게끔 저지하려는 마음으로 올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시체 팔아서 뭐한다 등등 정말 최악의 댓글들을 보면서도 저는 ‘아, 당신들이 뭘 원하는지 나는 안다. 아무리 그래도 내 굳은 의지는 당신들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뿐 아니라 세월호 유가족 분들까지 다 연대하면서 본인들은 어떻게 이겨나가고 있는지 얘기해주고 안아주고 손잡아주고. 멀리 있지만 함께하는 마음이 정말 의지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해도 ‘저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까’ 싶거든요. 저도 자식을 잃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몰랐어요. 유가족들은 같이 밥만 먹고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서로 아픔의 깊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위로가 됩니다.

황상기씨 = 삼성 본관 앞에서 3년 가까이 농성을 했어요. 삼성이 많은 노동자를 병에 걸려 죽게 만든 것, 그런데도 정부가 삼성에 엄청나게 큰 혜택을 주는 것 하나하나 다 지목해서 마이크에 대고 얘기했는데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삼성에서 돈 받아 처먹고는 왜 삼성을 못살게 구느냐.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는데 네까짓 것들이 왜 삼성을 못살게 구느냐’고들 했어요. 우리가 건 플래카드를 보수단체 회원들이 찢어놓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요. 주변 상인들은 우리 때문에 못살겠다고 신고하고, 구청에선 유인물을 치우라고 하고요. 그럴 때마다 화나고 속상한 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어요. 피해자 가족들은 한없이 우울해지고 초라해지거든요. 피해자 가족들끼리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되는 거예요.

■ 자식 잃고 난 뒤에야…국가와 기업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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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분들의 죽음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밝혀내기까지 처음엔 부모들이 혼자 싸우고 입증해야 했죠.

김용만씨 = 제 아들은 컴퓨터 관련 전공을 해서 자격증도 따고 어린 나이지만 특허도 냈어요.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호출해서 가보니까 뷔페식당으로 취업을 나가라는 거예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이고 연봉도 복리후생도 너무 잘돼 있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부모가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거잖아요. 한데 저녁에 너무 늦게 들어오고, 아이 체중이 70㎏에서 48㎏(키 174㎝)까지 빠지기에 이상하다 했어요. 저는 제 자식을 알잖아요.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닌데. 갑자기 일하다 뛰쳐나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회사에 가서 물어봐도 ‘다들 너무 잘해줬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만 했어요. 그런데 장례식에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한 사람도 안 오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요. 이건 내가 밝혀야겠다 싶었죠.

같이 일했던 동균이 친구 6명을 한 명씩 찾아가 제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어요. 알고 보니 ‘오마(오픈 마감) 벌칙’이라고 해서 고교 현장실습생의 군기를 잡고 인건비도 절약하는 악질적인 매뉴얼을 갖고 있더라고요. 동균이만 1~2시간씩 일찍 나오게 하고 욕하고, 왕따 아닌 왕따를 만들었어요. 동균이가 하루에 10~12시간씩 지하에서 죽, 수프를 끓였는데 일하다가 발에 화상을 입고도 스스로 치료비를 부담했대요. 파트장이란 사람이 동균이 엉덩이와 신체 주요 부위를 툭툭 치거나 건드리기도 했고요. 동균이 죽고 나서 휴대폰을 보니까, 파트장이 난잡한 섹스 동영상을 130개 정도 보냈더라고요. 현장실습을 중간에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가면 학교가 불이익을 받는다고 해서 애가 그만두지도 못한 거예요. 이걸 혼자 하나씩 밝혀나가는 과정이 진짜 죽음 같고 지옥 같았어요. 회사 찾아가면 업무방해라고 하고, 학교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 이걸 못 밝혀내면 저도 죽으려고 했어요.

김미숙씨 = 용균이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갔는데, 한국발전기술 하청업체 이사와 또 다른 사람이 저를 맞았어요. 용균이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해서 다쳤다는 거예요. 보험 들어놓은 게 있으니 그걸로 해결해주겠대요. 내 자식이 죽었는데 처음 만나서 이게 할 말인가? 거기서부터 의문이 생겼어요. (작업장에서) 이상 신호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업체 이사에게) 물어보니까 거긴 절대 가면 안된다고 지시를 내렸대요. 그런데 용균이 동료들한테 몰래 물어봤더니 가서 무조건 일하게 돼 있대요. 우리 용균이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구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시민대책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사실 처음엔 그분들도 다 믿질 못했어요. 아침저녁으로 회의에 참석했는데 처음엔 한국말인데도 하나도 알아듣질 못했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까, 귀에 들어오더라고요.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서 차츰 이분들이 정말 우리를 위해서 같이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상기씨 = 삼성에선 유미 병은 개인적인 질병이고 반도체공장에선 화학약품은 쓰지도 않는데, 왜 삼성에다 바가지를 씌우느냐고 아주 저를 쥐 잡듯이 잡았어요. 삼성하고 싸워야겠다는 마음은 먹었는데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내 모습이 아주 한없이 작아지는 거예요. 택시 운전을 하면서 손님들하고 얘길 하면, 전부 ‘아우, 삼성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그냥 참고 있어야지. 나중에 더 초라한 꼴이 된다’고 그랬어요. 그럴 때가 가장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세 사람은 자식이 죽고 나서야 국가나 기업이 한 개인을 노동자로서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사업장이나 다중이용시설 등에서 안전관리와 안전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기업의 대표이사 등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고 노회찬 의원 등이 발의했으나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억울한 죽음 없는 세상 만들기…살아가는 마지막 의미”

[커버스토리]죽음으로 시작된 이 가족의 이름은 ‘다시는’ 입니다

■ 내 자식은 못 돌아오지만…누군가의 아들딸이 안전해지는 것이 최고의 치유

- 세상이 바뀌어도 세 분의 아이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자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 텐데 이렇게 힘들게 싸우는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김미숙씨 = 저는 여태까지 나라가 어느 정도는 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은 발전했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근데 사회 안전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기득권들이 서민 자식들은 죽어도 된다고 그냥 눈감아버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버렸어요. 사회 곳곳이 엉켜있어요.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것에 분통이 터지고…우리나라가 창피합니다. 저는 이전에 누군가가 저처럼 나섰더라면, 사회가 바뀌었더라면, 우리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가족들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뭉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애는 못 돌아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어요. 저는 이제 살아야 할 의미가 없지만, 산다면 이것밖에 없어요. 기업들도 잘못하면 똑같이 벌 받게끔 하는 게 저희가 원하는 겁니다. 다시는 우리 자식들처럼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만드는 게 저의 바람이고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트라우마 치료를 다섯 번 정도 받았는데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치료가 아니에요. 법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안전해진다면… 그게 정말 저희가 원하는 트라우마 치료라고 봅니다.

황상기씨 = 어릴 적 우리 집에서 연탄을 땠어요. 연탄을 때면 방이 아주 따뜻하고 나무를 해오지 않아도 되니 힘도 덜 들었고요. 근데 그 연탄이란 게 노동자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서 광산에서 캐낸 거잖아요. 제가 택시 운전을 상당히 오랫동안 해왔는데요, 누군가가 비포장도로를 깔끔하게 포장해줬기 때문에 제가 먹고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무리 싸워도 우리 유미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상을 받고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해도 유미 엄마를 포함해서 우리 식구들 마음의 상처는 고쳐지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저도 여태껏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고 살아왔거든요. 저도 다른 노동자들에게, 미래의 노동자가 될 사람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덜 다치고 조금 덜 병에 걸리고… 10명 죽을 거 5명 죽고, 3명 죽고… 사망자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앞으로 산재 환자를 안 만드는 겁니다.

김용만씨 = 제가 우리 아들 문제로 싸웠던 목적 중에 하나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거였어요. 그때 교육부에서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2019년에도 변화가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그 제도를 확대 실시하고 있어요. (교육부는 이민호군의 죽음을 계기로 2018년 고교 현장실습제를 폐지했으나, 고교 취업률이 떨어지자 올해부터 재실시했다. 고교 현장실습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유가족들은 새 현장실습제가 오히려 기업의 안전점검과 책임을 완화시키는 쪽으로 개악됐다고 비판한다.) 정부와 기업은 한 몸이고 학교는 (기업에) 인신매매를 하는 곳 같아요. 정부보조금을 받고 지옥 같은 곳으로 아이들을 팔아먹는 거죠. 우리 서민들은 누가 얘기했듯이 개·돼지 아닌가 싶어요. 우리 아들도 하나의 노예로서 존재했구나, 일회용품이었구나,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누군가는 힘들지만 이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픔을 겪어온 우리 유가족이 아닌가 합니다. 저흰 아프지만, 아픈 만큼 더 힘을 합쳐서 열심히 투쟁해서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싸워나갈 겁니다.

■ 남겨진 가족들의 삶

고 김용균씨의 추모 조형물

고 김용균씨의 추모 조형물

‘다시는’의 가족들은 고교 현장실습제 폐지와 드라마 작업 환경개선,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 태안화력발전소 산재 진상규명 등 각각의 문제와도 싸우고 있다. 올 11월엔 이민호군 2주기를 맞아 함께 제주를 걸을 예정이다. ‘다시는’의 이상수 상임활동가는 “이분들은 서로를 만났을 때에 가장 편안한 표정이다. 느슨한 형태의 가족모임이지만 일터의 안전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며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가 이분들의 노력에 기대고 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산재 피해 가족들을 위해 정부가 시행했으면 하는 지원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낮아서이기도 하고 지난 시간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김용만씨 = 글쎄요. 아이가 죽고 나서 과거에 했던 일들은 이제 다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통신 쪽 엔지니어로 사업을 했는데, 몇년 지나니 업계 변화도 크고 제 성격도 변하고. 그런 걸 떠나서 사회에 다시 복귀할 수가 없어요. 동균이 위에 열 살 차이 나는 형과 최근에 화해를 했지만 거의 1년 넘게 서로 말을 안 했어요. 가정 파탄이 오는 거예요. 나로 인해서 아이가 그렇게 됐나 자책하는 거죠. 다른 유가족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황상기씨 = 일을 하다 다치면 다른 가족들이 훨씬 힘든 면이 많거든요. 간병해야지, 치료비 대야지. 경제적인 상황은 엉망이 되는 거예요. 병들거나 다치면 산재보험에서 1300일분에 대한 보상만 나오는데, 가족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전혀 없어요. 경제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나면 어떤 가정은 해체되거든요. 산재가정에 대한 지원책이 절실합니다.

김미숙씨 =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은 다 깨지고 부서집니다. 죽은 자식만 생각하다보니 자기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가 되죠. 나중에 정신차려보면 남은 자식이나 다른 가족의 상처가 깊어지고… 가정이 다 무너져 내려요.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회·경제 활동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한 사람만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고 봐요. 지금 유가족들을 안 좋게 바라보는 눈빛도 많은데요. 그냥 이웃이라고… 옛말에 먼 사촌보다 이웃이 가깝다고 했잖아요.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그런 눈빛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지난 4월28일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 김용균씨의 묘비 및 추모 조형물 제막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황상기씨와 김용만씨를 비롯해 ‘다시는’의 가족들이 함께했다. 이날 용균씨가 묻힌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울 아현동 철거지역 세입자로 강제철거를 비판하며 지난해 12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준경씨의 영결식도 있었다. 김미숙씨는 박씨의 무덤을 찾아가 고인의 어머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두 어머니는 “자식 잃은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며 흐느꼈다.

‘다시는’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김용균씨의 추모 조형물이 공개됐다. 용균씨가 자전거를 타고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담은 조형물이었다. 김미숙씨는 조형물에 손을 대고 울음을 토해냈다. “사랑하는 아들아. 죽을 때까지 못 본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 너한테 꼭 약속할게. 엄마가 꼭 해낼 거야. 너처럼 죽지 않게끔. 많이 늦었다는 거 안다. 하지만 엄마가 꼭 해낼게….”

김승섭 교수(고려대 보건과학과)는 2017년 펴낸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개개인이 무장을 해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사회적 원인을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회가 수십년 동안 눈감아온 문제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먼저 자신의 아픔으로 길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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