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대교
만약 다리 하나에서 풀어낸 이야기로 두꺼운 책을 써야만 한다면, 이 다리를 고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섬과 육지를 잇는 최초의 근대식 다리,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도개교(跳開橋) 자격으로 영도대교는 교량 건설사에 먼저 이름을 올린다. 그다음은 한국사와 대중문화사에 등장할 차례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 애인과 친구의 입에서 나온 모든 지역의 사투리로, 비슷한 내용의 약속들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무수하게 체결되었다. “먼저 부산으로 내려가 있어. 곧 따라갈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 영도다리에서 꼭 다시 만나자.”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다리는 북적였지만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언제쯤 나타날까? 살아는 있을까? 불가능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리 밑으로 늘어선 점집들은 현실을 받아들인 피란민들이 흩어진 뒤로도 남았다. 1950년대의 대표적인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화자는 1·4 후퇴로 부산까지 홀로 떠밀려온 피란민이다. ‘영도다리 난간에서 금순이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초승달만 외로이 떠 있을’ 뿐이다. 1960년 발표된 가요 ‘추억의 영도다리’의 화자가 “누굴 찾아 헤매이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영도다리 난간을 붙잡고 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영도대교의 탄생 배경은 또 다른 전쟁과 관련이 있다. 1887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목선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를 시작으로 영도에는 수십개의 조선소가 들어섰다. 중일전쟁을 앞두고는 동양척식회사와 미쓰비시중공업의 합작으로 기존 공장을 합병한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탄생한다. 영도대교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이송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도는 산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는 해방 후 국영기업인 대한조선공사로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의 전략수출업종으로 선택받아 지금은 세계 1위가 된 철강조선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현재 소유자는 한진중공업이다.
국내 유일 도개교인 이 다리에는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로 대변된
피란민들의 약속과 눈물이 있고
일제부터 산업사에서 큰 의미 지녀
피눈물의 노동운동 진기록도 많아
그 반대편에서는 노동운동사의 온갖 진기록이 줄줄이 뒤따른다. 1921년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에 호응하여, 영도 조선소의 노동자 800여명은 동맹파업으로 임금 인상 요구를 관철시켰다. 노동자는 한국인이었고 기업은 일본인 소유였기에, 학생들은 이 파업이 항일운동이었다고 배운다. 해방 직후에는 자주관리운동을 벌인 노동자들이 자본의 기업 소유를 배제하고 몇 년간 조선소를 직접 경영하는 기적을 썼다. 대개의 노동운동 연구에서는 IMF 구제금융을 기점으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기술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도 전인 1960년대 이곳에서는 임시공 해고 반대 파업이 일어났고 또 성공했다. 영도 조선소의 노동운동은 민영화와 함께 암흑기에 접어든다. 1969년 사상 처음으로 긴급조정권을 발동한 정부는 대한조선공사 노동자 파업을 막아섰다. 정부가 행사한 역대 세 번의 긴급조정권 중 최초의 사례다. 19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의 기폭제가 된 대한조선공사 점거 시위를 계기로 영도의 노동운동은 부활했다. 부산 시내의 한 법률회사에서 조선소 노동자들의 편을 자처하고 나섰다. 작고 볼품없는 이 회사의 이름은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였다. 당시 법적인 조력을 받았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국내 최초의 여성용접공이었다. 그는 공장이 한진중공업에 인수된 뒤 309일 동안 크레인에 올라 정리해고 반대 농성을 벌였다. 뒤따른 고공농성들에 금방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는 2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떨어뜨려놓은 세계 최장의 고공농성 기록이었다. 반면에 김진숙 위원에게 부과된 농성 해제 이행강제금 3억원 역시 노동자 개인으로는 사상 최대액이었다. 별도로 한진중공업은 158억원의 손해배상액을 노동조합에 청구했다. 이를 계기로 기업의 손배·가압류 남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화되었지만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현상은 정치학과 경제학과 사회학이 공통으로 매달려온 커다란 주제의 일부분이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까지도 승승장구하던 노동운동은, 왜 손에 칼을 쥔 권력이 사라지자 패배의 신기록만을 경신하게 된 걸까?
하지만 내가 답사를 떠난 역사가의 마음가짐으로 영도대교를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영도에 머물면서 구도심으로 밥을 먹으려고 나갈 때마다 이 다리를 지났을 뿐이다. 미식가들은 남도 식당을 추켜세우지만, 나는 경상도 식당의 단순하고 소박한 맛을 더 좋아한다. 특히 전쟁의 포화를 벗어난 거리 위에 시간이 첩첩이 쌓인 부산의 구도심은 오랜 업력의 노포가 빽빽하게 밀집한 지역이다.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한결같은 상권에서 유행에 영향받거나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수십년 동안 장사해온 특색 있는 음식점이 많다.
1945년 개업한 서울깍두기의 설렁탕, 1946년 개업한 명물횟집의 회백밥, 1947년 개업한 18번완당집의 완당면, 1951년 개업한 할매집회국수의 회국수, 한국전쟁 기간 개업한 고갈비할매집의 고갈비, 1953년 개업한 원산면옥의 물냉면, 1956년 개업한 중앙모밀의 모밀국수, 1958년 개업한 백광상회의 오뎅탕, 1959년 개업한 백구당의 크로이즌, 1959년 개업한 남포삼계탕의 삼계탕, 1960년 개업한 동화반점의 볶음밥, 1960년 개업한 삼송초밥의 회초밥, 1965년 개업한 종각집의 가락국수, 1966년 개업한 신흥반점의 삼선짬뽕, 1960년대 개업한 오뚜기식당과 중앙식당의 회백반, 1972년 개업한 남포수제비의 수제비, 1974년 개업한 할매가야밀면의 물밀면, 1975년 개업한 바다집의 수중전골, 1975년 개업한 개미집의 낙지볶음, 1976년 개업한 실비집의 주꾸미구이, 1979년 개업한 사해방의 찐만두, 1979년 개업한 양산박의 달고기생선전, 1980년 개업한 화국반점의 간짜장, 1982년 개업한 돌고래순두부의 순두부찌개, 남포동 팥빙수골목의 단팥죽, 창선동 먹자골목의 비빔당면, 비프 광장의 떡볶이,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지질 단층처럼 내력이 잘 보존된 역사를 맛보는 것이다.
음, <수요미식회> 대본을 집필하는 게 아닌데 너무 흥분했다. 잠시 한 줄 쉬고 영도대교로 돌아간다.
영도대교, 작별, 그리고 죽음. 이 연쇄적인 이미지는 독특하게 부산적인 정서를 이룬다. 부산의 유력인사들이 모인 초원복집 회동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역감정으로도 표가 모이지 않는다면 영도대교에서 같이 빠져 죽자”고 말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영도대교에서 죽는 것과 부산대교에서 죽는 것과 광안대교에서 죽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외지인은 한 단어의 고유명사에 압축된 정치적 상징 체계를 읽어낼 수 없다. 공천파동을 일으켜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김무성 의원이 난간 바깥으로 몸을 위태롭게 내밀고 바다를 응시했던 장소도 영도대교였다. 그 사진을 싣는 데 1면 전체를 할애했던 유력 일간지는 헤드라인을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건너다”로 뽑았다. 영도대교에 부여된 정치적 상징성을 이보다 절묘하게 잡아낼 수는 없을 듯하다. 이 다리의 이름을 호출하는 것은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신호이며, 잠들어 있던 동지들을 흔들어 깨워 결집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는 것과 같다. 이토록 강한 형제애가 무엇인지 느껴보고 싶다면 영도대교 아래 부둣가에 들어서는 포장마차촌에 들러도 좋다.
내가 도착했던 금요일 밤에는 부둣가에서 두 남자가 주먹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승부는 곧 가려졌고,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의식을 잃은 채 뻗은 패자의 몸뚱이만이 남았다. 경찰을 불러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가게 주인은 종종 있는 일이니 내버려두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다. 또 다른 젊은 남자 두 명은 여자 일행이 앉은 테이블만 골라 합석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부산말로는 까대기를 치는 것이었다. 막 서울을 벗어난 여행자의 들뜬 마음으로 농담을 던져보았다. “받아주는 테이블이 없나본데 여기에 합석할래요?” 그들은 내 문어숙회 그릇에 시선을 힐끗 주더니 정말로 눌러앉아버렸고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나를 행님, 이라 불렀다. 부둣가에 쓰러져 있던 남자는 그사이 깨어나 자신을 때려눕힌 폭행범과 화해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검은 바다 위로 새하얀 어선들이 정박되어 있었고, 해협 건너 전광판처럼 펼쳐진 번화가의 불빛으로 밤은 어두워질 기색이 없었다. 영도대교는 그 사이를 잇는 다리였다. 이것이 심각한 편견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부산 사나이의 이미지는 영도대교 밑 부둣가의 정신 나간 금요일 밤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다리 이름을 호출하는 건
초원복집·김무성 사태에서 보듯
절체절명의 위기에 동지 결집하는
압축된 정치적 상징체계가 있다
다리를 건너 영도 깊숙이 들어갈수록 시간은 더 멀어지고 공간은 더 고요해진다. 영선동 바닷가를 면한 흰여울마을은 수용시설 포화 전에 입소하는 행운을 잡지 못한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세우면서 형성되었다. 부모를 따라 정착한 피란민 2세대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여기에서 유년기와 신혼기를 보냈다. 가파른 계단, 비좁은 골목, 낮은 시멘트 담벼락, 그리고 그 너머로 끝없이 뻗은 수평선을 보기 전까지, 나는 바다를 정원 삼는 것은 부자의 전유물이라 믿었다. 이곳 주민들은 알루미늄 새시의 통유리문을 열어젖혀두고 햇살에 부서지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아침밥을 먹는다. 해안을 따라 나란히 늘어선 모든 집들이 궁핍과 바다 조망을 반세기 넘도록 공평하게 나눴다. 익히 들어왔던 사회윤리의 한 부분을 붓으로 그린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한 이유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들 각각을 현재 위치로 인도한 갈림길은 어디였는지. 그들 각각의 세계를 만들어낸 우연은 무엇이었는지. 부산 출신 정치인으로서는 특수해 보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개성에도 유년기를 보낸 마을의 낭만적 풍광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남포동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할 때 흰여울마을에 사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얼마 전에 가출했다는 그는 멀리는 도망가지 못하고 영도대교 건너에서 머물고 있었다.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그의 마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그런 곳에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거기 살고 싶었던 나의 오랜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서울에 사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진 질문으로 그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라모 우리 집이랑 바꾸실래예?” 하지만 거기 살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그 바람을 책에 적어놓았다.
“부산 시내를 혼자 돌아다녔다. 보수동의 헌책방에서 먼지가 내려앉은 80년대 만화를 뒤적이다가, 영도의 야트막한 산을 올라 무너진 회벽 사이로 시퍼렇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엿보았다. 햇살에 부서지는 드넓은 바다 위로는 늘 유조선과 화물선들이 고래떼처럼 몰려다녔다. 늦은 오후 자갈치 시장거리의 좌판에서 할매가 구워내는 고등어구이 백반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동광동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병을 땄다. 산복도로를 따라 걸어 되돌아가는 길에 하루는 급작스럽게 저물었다. 붉은 태양은 거대한 돔처럼 해안의 도시를 품에 끌어안고 장엄하게 바다로 침몰했다. 나는 산허리에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넋놓고 구경했다. 매일매일, 이 도시는 서쪽 바다에서 종말하고 동쪽 바다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하루를 무사히 끝낼 때마다 나는 부산이 더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둠이 발아래까지 깔리고 머리 위로 별이 떠오르면 다시 부지런하게 걸었다. 나는 부산에 눌러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디 마이너스>)